2010년 7월 1일 목요일

7월 1일 트윗 큐티 / 창세기 26:1-11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hanbaek
흉년이 들어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이삭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큰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김없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흉년으로 힘겨워하며 삶의 자리를 옮기는 현장에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에 이삭이 힘겨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픔을 이미 아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이미 아시기에 찾아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위로란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할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우리가 찾아가서 괜찮아 다리 하나 없다고 안죽어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지만, 두 발이 없는 분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다리가 없는건 불편한거지 못사는게 아니라고 말해주면 깊은 위로가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이삭이 흉년 들었을 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속에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하면 복을 받고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님이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도 이삭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삭은 리브가가 너무 아름다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리브가를 취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리브가를 누이라 속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지만 온전한 믿음이 없는 이삭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따사로운 은혜를 입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고 힘있는 사람들 앞에서 약해지고, 소위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무마합니다. 때론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가족을 속이기도 하면서 살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프신 은혜를 의지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습니다. 당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나라, 양심이 통하는 세상고 교회를 심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우상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사랑하는걸 보고 이삭에게 설명을 요구합니다. 이삭은 진실을 말하게 되는데, 보통의 왕같으면 이삭에게 큰 벌을 내리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겠지만 아비멜렉은 오히려 이삭이을 해하거나 리브가를 범하면 죽인다고 백성에게 공포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비멜렉의 마음 속에 이삭을 향한 지지를 심어 두셔서 이삭으로 하여금 위기를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므런 표시도 내지 않고 우리의 삶을 도와 주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의 노력보다 내가 행한 것보다 큰 은혜가 임할 때마다 이 사건 속에서 은밀히 도우시는 손길이 우리에게도 임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하며 우리가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복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십니다. 이러한 감격이 오늘의 삶 속에 가득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6월 30일 창세기 25:19-26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삭 가정의 가장 큰 문제의 시발점이 나타나는 본문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하나이지만 두개의 분리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아들들이 살아가는 가정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이삭과 에서가 한편이고, 리브가와 야곱이 한편인 두개의 가정이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는데 그 사랑함의 중요한 모티브가 사냥한 고기였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지만 에서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들로 나가 사냥을 해야했고,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대신 결과물인 사냥감을 들고 오면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이삭과 에서의 사랑을 이어주는 사냥한 고기는 결국 에서에게 주었다고 생각한 축복을 야곱이 받는 최고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이 무엇을 하였기에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들이 좋은 학교를 들어가거나, 아들이 뛰어날 때 주로 아버지들은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들의 인격 자체를 사랑함이 아니기에 이삭과 같이 실패한 사랑이기 쉽습니다.

리브가와 야곱 또한 완전한 한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한 이유는 이삭과 조금 달랐습니다. 야곱은 주로 어머니 곁에 머물렀고 자연히 대화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야곱과 리브가는 가까워졌고 야곱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어머니 곁에 머물렀기에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야곱과 리브가는 모녀간의 깊이 있는 소통이 이루어졌고 리브가는 아무런 조건이나 바람없이 에서보다 더 많이 야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은 리브가로 하여금 조금 부족해보이는 야곱이 하늘의 복을 받게 하고 싶었고 초대형사고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도 어떠한 사랑이 더 큰가를 보여줍니다. 조건없는 사랑, 모자라도 함께 하는 사랑이 힘있습니다.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무엇 일지라도의 사랑이 강력합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리브가를 통해서 알게 하십니다.

야곱은 성품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팥죽 한그릇으로 배고파 쓰러지려는 형 에서와 협상합니다. 배고픈 형에게 식량을 무기삼아 장자권을 받습니다. 사실 자라나는 쌍둥이에게 장자권이란 별것 아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증서도 아니고 도장을 찍어서 증거로 남긴 것도 아닙니다. 에서에게는 아주 작은 시간의 차이로 평생을 동생으로 살던 야곱이 마치 나를 형이라 부르면 내가 팥죽 줄께라는 표현 정도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맹세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일생에서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고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성경이 에서와 야곱의 삶 전체를 기록하였다면 이 부분을 우리가 찾아내서 확인하기 조차 힘든 언어적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둘의 운명을 뒤바꿉니다. 참으로 나비효과를 지닌 언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긍정의 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드러내는 말을 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나긴 우리의 일생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나의 한마디가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혀를 지켜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21:14-21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hanbaek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 서자 이스마엘을 광야로 좇아내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사회적 약자는 어린아이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좇겨나는 하갈은 이미 과부의 신분이며 이스마엘 역시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아이입니다. 게다가 집을 떠나는 신세이므로 나그네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성경이 말하는 3대 약자의 모습을 모두 갖춘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보내지는 땅은 브엘세바 광야입니다. 광야는 본래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지금도 광야 한복판에 길을 모르는 사람을 내려 놓으면 헤메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암흑의 땅입니다. 메마르고 먹을게 없는 사지로 약자인 하갈과 이스마엘은 떡과 물 한 가죽부대 만을 가지고 내쳐집니다. 하갈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마음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더 큰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는 아들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하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바라보며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아들 이스마엘 역시 엄마의 울음 소리를 듣고는 소리내어 울게 됩니다. 모자의 울음은 탄식보다 강하였고 심장에서부터 울리는 고통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더이상 슬플 수 없는 가장 극심한 심적, 육체적 고통을 맛보았고 소년 이스마엘 역시 타는 목마름과 어머니의 눈물을 통해 극한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러한 눈물과 아픔의 현장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친히 그 고통을 씻겨 주시러 찾아오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눈물의 현장에, 세상의 사회적 약자의 가장 심각한 모습을 지닌 나그네되어 죽음을 목전에 둔 과부와 아이에게 주님은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울음과 아픔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늬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심이저 우리가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아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탄식으로 가득하고 빛이 없어 보이는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늘 두려움 없는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희망의 눈을 뜨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갈에게는 샘물이 보였고 그곳에서마시며 물을 채우고 힘차게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늘 함께 하셔서 광야에서조차 살아남아 성장하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보게하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온몸으로 알게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오늘 우리의 상황이 힘겨워도 힘차게 주를 향해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창세기 19:23-29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으로 ㅠㅠ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hanbaek
"하나님이 롯의 가족들에게 도망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화를 입는다고 했으나 롯의 부은인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입니다. 사위들은 따라오지 않고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이 도망쳤으나 아내 역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도 두 딸도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가족이 당하는 화는 남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깁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에 롯의 아내를 비방하는 해석은 너무나 율법적입니다. 오히려 남은 가족이 느낀 아내와 엄마 잃은 눈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온 가족이 하나님 나라에서 환한 웃음을 웃기 위해서 우리는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중에 어느 누구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고통받지 않도록 손을 잡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야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은 결국 자녀를 경책하시는 마음으로 최후의 결단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참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밝히고 정결케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나눔의 삶을 실천할 때에 죽어가는 세상이 희망을 보게 되며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 갑니다. 우리가 의인의 삶을 살아 소알을 구하고 내 주변에 있는 소돔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스마트폰과 영성

스마트폰과 영성

김태연 목사 @hanbaek

작년말 등장한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이 소리없이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무엇이길래 메가톤급 폭발력을 가진 힘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은 컴퓨터가 하는 일을 대신하는 손안의 컴퓨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50점 정도되는 정답입니다. 스마트폰이란 단순하게 작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은 사용자에게 24시간 내내, 어느 장소에 있어도 네트웍에 연결하여 있게 하는 몸의 일부와 같은 새로운 기기입니다. 컴퓨터는 우리가 일을 하려고 할 때 켜고 끝나면 끄는겁니다. 또한 우리가 산위에 올라가거나 하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계속 네트웍에 접속하는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지리산 꼭대기에서 전화가 되기만 하면 우리를 네트웍에 연결시켜 놓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터치만 하면 세상과 즉각적인 소통이 일어나는게 스마트폰의 진정한 힘입니다.


또한 스마트폰은 3 Screen이 통합되는 모델입니다. 세 개의 스크린이란 TV, 컴퓨터 그리고 핸드폰을 말합니다. TV가 진화하여 DMB가 되었습니다. TV가 손안으로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컴퓨터는 넷북으로 진화했습니다. 800그램으로 이동성을 확보했습니다. 전화는 더 크고 편안한 창으로 쉽게 사용하는 방향으로 터치스크린을 장착했습니다. 하지만 TV에서 컴퓨팅이나 전화는 할 수 없었고, 넷북으로 전화를 하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또한 핸드폰으로 컴퓨팅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이 세가지 기능을 모두 갖추고 완벽하게 이 일들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통합으로 스마트폰은 전에 세상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기기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스마트폰이 전무후무한 힘을 가진 새로운 기기라는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어떤 기능이 세상을 바꿀 새로운 힘의 주체라는 겁니까? 그리고 스마트폰은 일부 젊은이들만 사용하는 최첨단 디지털 기기가 아닙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쉬운 두 번째 답부터 하자면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기능의 통합을 생각하시면 정답이 나옵니다. TV가 어려운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이제 70대 어른신들도 핸드폰으로 문자는 보내십니다. 결국 컴퓨터가 조금 어렵습니다. 하지만 쉬운 TV와 핸드폰 +컴퓨터이기에 스마트폰은 일반 컴퓨터에 비해서는 정말로 쉽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쉽고 편리해 집니다. 거의 완벽한 수준의 음성인식도 이제 곧 스마트폰을 통해서 구현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드립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한 디지털혁명은 SNS(Social Network Service, 대표적인 서비스가 트위터, 페이스북입니다)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컴퓨터와 했던 모든 일은 특정회사의 컴퓨터와의 대화였습니다. 네이버 지식검색을 할 때 우리는 네이버의 서버와 만나서 대답을 얻는 겁니다. 우리가 구글을 통해서 검색을 할 때에는 구글의 데이터센터에 있는 로봇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대답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컴퓨터로 했던 거의 모든 작업들은 회사의 서버와 데이터센터와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SNS를 통해서 이제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사람과 연결되는 새로운 네트웍이 시작되었습니다.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컴퓨터와의 대화를 떠나서 사람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컴뮤니테이션의 주체에 서버가 아닌 내가 자리를 잡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 콘서트에 갔다가 아이폰의 배터리가 14%밖에 안남았습니다. 상황을 계속 현장 중계하려면 여분 배터리가 절대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 제가 트위터로 내가 처한 상황을 보냈는데 불과 5분 안에 충전배터리를 가지신 분에게 연락이 왔고 만명이 넘게 모인 복잡한 장소에서 서로 연락하여서 만나 계속 상황을 중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네이버나 구글에 글을 등록했다면 다시말해 서버와 만남을 시도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새로운 네트웍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의 키워드는 인간이 중심되는 네트웍을 통한 소통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는 소통이 일어나게 해주는 가장 편리한 도구입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세상과의 소통은 우리 기독교의 영성과도 상당히 유사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처한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음성을 발하기도 해야 합니다. 가장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은 24시간 어느 장소에 있든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우리의 현재에 하나님과 소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네트웍에 연결되어 있었던 경험이 없기에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몸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직접적으로 소통한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닫습니다. 작은 기기 하나로 세상과 직접 연결되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의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고 귀를 기울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입을 벌려 소원을 말씀할 수 있는 확실성을 우리에게 제공했습니다. 변화의 시대에 우리의 영으로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의 몸으로 세상과 소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단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스마트폰을 필두로 생겨나는 인간만 중심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시각이 인간에게만 집중되면 지나친 인본주의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자연을 대상화하여 파괴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손에 든 기기가 첨단을 넘어 온 세상을 한눈에 바라보는 진보를 이룬다할지라도 우리의 심장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땅을 지키고 보존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아이폰용 터치펜

가까운 지인께서 선물로 주신 터치펜을 써보고 많이 주셨기에,
트위터에서 @hanbaek 을 팔로잉하고 이와 관련된 글을 RT하면 10분을 추첨해서 아이폰용으로 나온 터치펜을 나눠드리는 이벤트로 진행합니다.

아이폰은 정전기식이라 펜 앞쪽에 반도체로 만든 플라스틱을 부착해야 합니다.
게다가 일정 크기 이상이 화면에 눌려야 하기 때문에 평범한 면이 항상 터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부분이 중력을 따라 돌아가는 방식으로 설계했으며, 이 부분을 특허로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이폰용이라고 적었지만 안드로이드에서도 다 사용할 수 있는 터치펜입니다.

모양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중에서 2만 4천원에 판매되고 있는 모델이고 물론 한개만 따로 포장되어서 착불로 드립니다. 제가 혼자 발송하다 보니 택배비의 압박으로 인해서리 ㅠㅠ


터치펜은 정전기식이므로 가급적 얇은 보호필름을 사용시거나 저처럼 아예 사용하시지 않을 때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한쪽은 손으로 잡아 주시면 감도를 높인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이벤트 저도 즐겁고요. 받으시는 분도 즐겁게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꾸벅..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16:6-14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사래의 핍박이 너무나 심하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하지만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광야의 길을 떠나는건 너무나 위험한 행위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광야길을 달리면서 가진 생각은 절대로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 입니다. 왜냐면 광야의 길은 너무나 험하고 두려워서 차안에 있으면서도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광야길을 홀로 걸어가는 하갈에게는 수많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이 임신한 아이와 함께 죽을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한발한발을 눈물로 나아가는 하갈에게 야훼께서 보내신 사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하갈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권고와 위로를 전했습니다.

본문에서 하갈은 하나님께 기도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먼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과 탄식을 들으십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탄식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첫번째 소리입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나 힘겹고 괴로울 때는 기도하기조차 버겁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한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가장 합당한 응답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에서도 너무 마음이 슬퍼 취한 여인과 같이 탄식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응답을 주셨습니다. 오늘 고통받는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께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이스마엘은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깨닫고 감격하는 삶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탄식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길 소망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과 나를 위한 도우심이 온 몸으로 느껴져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감격의 날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12: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왜냐면 내가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비전으로 보여주셨고, 그곳에는 먹을 음식과 풍성한 삶이 보장되나는 걸 구체적으로 알려주신게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로 가야할지 그 땅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은채 앞으로 내가 그 땅을 보여줄테니 일단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시대에는 씨족 공동체였습니다. 이 당시에 부족을 떠나는건 무척이나 위험한 행위이며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실재로 아브람은 후에 아내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족장에게 바치는 두려운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냥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다고 했으니 보여주실꺼라 믿는 믿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시고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람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때론 넘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결정적 순간마다 하나님의 가능성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이끄시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소중합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론 넘어지고 좌절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필요한건 다름아닌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내 속에 있는 솔직한 마음을 드리고 폭풍과 천둥과 지진과 같은 거대함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때 우리는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몸이 귀가 되어 하난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마음에 합한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하며 복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된다는 말씀은 복 자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분깃이 되시면 우리의 온 삶이 평안해 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걸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 자체가 되면 우리를 통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복의 스펙트럼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누는 통로가 됩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복이 되어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전달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복이 되었기에 그의 후손돌은 모두 하나님의 복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소망은 내가 무엇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는 행위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는 절대적 소망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 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누어지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나를 통해 세상에 전달되는 감격, 그래서 이 땅이 하나님 나라로 변모해가는 기쁨을 '나의 존재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오늘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0년 5월 3일 월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8:13-19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홍수가 끝나고 물이 줄어 들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는 소통의 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대화하고 교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알려주시고 행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아니 지금 바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요청하는 대로 따라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오늘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모든 생물을 방주에서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신 후에 "생물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 건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받은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작품들은 하나님이 복주시고 키워주신 마스터피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작품에 손상을 입히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우리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만든 땅따먹기와 소유물인 것처럼 행동하는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서 쓰시도록 하신 땅에서 우리는 공생의 삶을 꿈꾸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8명의 식구들과 모든 동물들은 새로운 창조세계를 위한 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중 한명한명이 인류의 주인공이며, 동물 한 쌍 중 한마리만 죽어도 종이 씨가 마르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들짐승 한마리도 가장 고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온 세상에 사람으로 가득하고 동물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고 내 주변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더욱 이웃을 존중히 여기며 오늘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귀히 여기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노아의 심장을 품고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7:6-12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의 나이가 육백살이었습니다. 노아의 나이를 보면서 또한번 놀라게 됩니다. 우리의 일생이 길어도 일백년인데 살아가는 동안 너무나 많은 죄악을 범하고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위대해 보이는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70세가 넘으셔서 은퇴하실 때가 되면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600년을 사시면서도 의인이며 당대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노아를 생각하면 다시금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새출발을 다짐해 봅니다. 600세의 1/10도 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날 동안에 죄악된 길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드리려 합니다.

노아와 세아들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들은 모두 방주에 들어가는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노아가 만일 혼자 살아 남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함께 살아 가도록 설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만나고 함께 일하는 모든 분들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다고 하면 세상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울까요? 하나님이 사람들을 주신 이유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시길 소망합니다.

드디어 대홍수가 일어납니다. 사십주야 동안에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또한 땅에서 샘들이 터져 물을 쏟아 냈습니다.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물을 부어 40일 동안 지속되자 온 세상은 다 물에 잠기게 됩니다. 세상이 다 잠긴 상태로 물위에 떠서 목적지 조차 없이 방주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니고 있습니다. 그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방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암흑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방주를 안전하게 안착시키리라 믿으며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홍수의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기에 노아의 가족은 어두움을 뚫고 빛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설마 방주처럼 흔들리겠습니까? 그 때만큼 위험하겠습니까? 삶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약속을 믿고 힘차가 걸어가 평안한 삶으로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4:5-8

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hanbaek
죄를 범한 인간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삶과 예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엄청난 분노를 일으킵니다. 왜 그럴까요?
가인에게는 아벨과의 비교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컴플렉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은 악하고 아벨의 삶은 선하고 자신은 타인에게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하지만 아벨은 사랑받고 있음에 대하여 심한 비교의식이 있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분노는 경쟁자에게 표출되곤 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사랑받기 위해 삶을 고치기 보다는 경쟁자를 향한 분노로 동생을 죽입니다.
인간은 비교대상자를 향하여 지독한 분노가 있으며 그가 없어지면 세상이 자신을 향하여 돌아오리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인처럼 경쟁자를 향한 컴플렉스가 우리를 덮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을 버리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가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인에게 있는 죄성과 분노를 삭히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 큰 가인의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장에서 분노의 감정은 일어나곤 합니다. 때론 정말 참을 수 없을만큼 우리를 힘겹게 하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이상 견딜 수 없어 폭발하려 할 때 우리의 심장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음성입니다. 이 세미한 음성에 귀를 귀울이면 우리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분노 게이지가 오르려하고 우리의 마음이 범죄하려 할 때에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멈출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synsophia
말씀을 보면서, 처음에는 가인이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 상황에서 회개하지 않았을까.... 3인칭으로 가인을 바라봤습니다. 저러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곱씹을수록, 지금 가인의 모습이 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만, 머리와 입술에 그치는 회개가 대부분이었던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냥 머리로만 죄를 인정하고 행동으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생각이 드니 도저히 이 말씀을 계속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머리로만 회개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솔직히 앞으로도 머리로만 회개하는 일이 많을 텐데... 왜냐하면 그게 내 본성이고 죄성이니까.... 그럴 때마다 내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셔서 머리에서 그치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이 변하는, 행동이 이어지는 회개를 하게 해 달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는 가인의 모습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는 내가 되어 달라고...

@eripu
왜 우리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의 모습을 떠나 살인자가 되려고 할까요. 우리에게 그 죄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자 바꿀 수 없는 슬픈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죄를 허락한다면, 정말 죄가 우리가 나가는 문 앞에 엎드려서 곧바로 우리를 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대속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가 우리 삶 속에 필요합니다.

@YoungYeon
형제는 하나님이 가족으로 허락하신 좋은 친구입니다. 사랑으로 혈연으로 묶인, 그러다보니 그 친밀감이 강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가인은 죄를 다스리라는 말에 오히려 그 시기 질투심을 묵상하다가 결국 일을 저지릅니다. 선한의지를 품으면 살려고 애써도 한번 울컥허면 맘이 악한 생각을 품게되는데,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않고 그냥 놔두다가  결국 형제를 죽입니다.

오늘 저도 맘속에 선한 것으로 채우고 있는지, 내 삶 속에 죄가 들어오고 나의 친숙한 죄성이 고개를 들때 그 것을 다스리며 나아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문에 엎드려 있는 죄를 보지 못하면 걸려 넘어지니, 그런지 않도록 선한 마음을 지키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TAE_HYUN
내 안에 숨어 있는 비교 의식, 시기, 질투, 원망, 욕심... 모두 깨끗하게 비워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텐데 여전히 죄에 얽매여 있는 제 모습이 밉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 죄를 다스려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graceviky
태어날 때부터 아마도 가인은 자격지심 같은게 있었나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벨이 부러웠겠죠? 그래서 저도 사랑을 나눠주려 노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의 상처나 아픔때문에 범죄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죄를 다스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가인은 또다른 범죄를 행합니다. 제 마음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깨닫고 다스려야 하는데 남탓하고 내 자격지심에 싸여 다른사람들에게 또다른 범죄를 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오늘은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는 인간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왜 선악과를 먹은 것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정확하게 알게되면 우리는 선악과의 유혹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물론 아는 것과 행하는건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선악과란 무엇일까요? 선악과는 말 그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입니다. 왜 그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선과 악을 아라야 인간이 더욱 선한 일을 할텐데..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과 악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인간이 가는 길은 늘 악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길이 넓고 편안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순환하기 마련인데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늘 악을 선택했습니다. 전쟁과 경쟁에서 이기는 길에 악한 생각과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성이라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악을 알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잘못입니다. 악한 방법을 피하고자 매스컴이 알려주면 더 많은 모방범죄가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악한 소리, 악한 생각, 악의 방법 등을 우리의 머리와 입술 그리고 삶 속에서 버려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마음만 생각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고자 순종하면서 악을 잊은채 살아가는 순결한 자세를 견지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을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먹으면 죽지 않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뱀이 말했습니다. 아담의 입장에서는 분명 둘중에 한쪽은 거짓을 말한 겁니다. 그럼 먹고 죽을 확률이 50%입니다. 그리고 죽지 않으면 하나님 처럼 될 확률도 50%입니다. 우리가 러시안 룰렛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총을 쏴서 머리에 맞을 확률이 50%라고 하면 누가 감히 방화쇠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죽을 확률이 50%인데도 선악과를 먹는 인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인간의 원죄란 다름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일에는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처럼 인간을 다스리는 자리에 갈 수 있다고 하면 영혼을 파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처럼 되는 힘을 때론 돈에서 때론 명예에서 때론 권력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100만불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보물섬을 찾은 사람들끼리 서로 독살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걸 장면을 보면서 세상에 저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일상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그보다 더 한일도 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건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즉각 죽은게 아닙니다. 실제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사리를 알게 되어 부끄러워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걸까요?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셨고 인간은 밝아진 눈으로 살인을 하는 족보를 창세기 4장부터 만들어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정녕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뱀이 말한데로 눈은 밝아졌으나 하나님처럼 되지는 못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절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밸과 사탄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처럼 될거라고 하는 어리석은 욕심을 가지게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더 많은 사람을 상처입히고 자신 또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신비로 오히려 더 낮은 자로 살아갈 때 원죄의 욕망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인카네이션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하도록 우리를 쳐서 복종시키는 믿음의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2:18-19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조에 관하여 약간의 상충되는 부분이 등장하는건 성서학자들이 찾아낸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19절에 보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들짐승을 만드셨지만 2장에서는 손수 흙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약간의 차이는 고대에 있었던 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이 더욱 오래된 자료이고 창세기 1장은 보다 신학화되어 정리된 후대의 자료입니다. 이러한 상충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창조이야기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있기 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보고 적었겠으며 그 당시에 무슨 문자가 있었겠습니까? 첫번째 사람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가 후대로 오면서 얼마나 많은 변형을 일으켰겠습니까?를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며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담이 생물을 부르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름이란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목사님하고 소리치면 전 늘 저를 부르는줄 알고 뒤를 돌아봅니다. ㅠㅠ 직업병입니다. 목사라는 이름이 이미 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제 이름이 소시의 태연과 같기에 공연히 태연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ㅋ 인디언들은 이름을 존재를 담아서 짓기로 유명합니다. 늑대와의 춤을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늑대와의 춤을 인것은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존재가 담겨져있기에 우리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묵상해보면 우리가 불리는 이름의 의미가 온전한지 나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건 부모의 몫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는 이름을 지을 권리가 있습니다. 제 큰 아들의 이름은 임신 3개월에 이미 지었습니다. 그런 권세를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이 부르는게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또 하나의 창조이자 존재로 하여금 의미있게 하는 힘입니다. 이러한 자격을 아담은 부여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대자연의 어버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자연의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대해야 하고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답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짓고 부를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를 부모로 삼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그 역활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 복으로 충만하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트윗 매일 큐티 / 고린도전서 11:20-29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hanbaek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대부분 주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 중에서 이 글만은 사도바울이 분명히 알고 있는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주님이 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본문의 내용과 해석은 오늘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단히 의미깊은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진행하는 고린도교회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부자와 빈자 그리고 주인과 종이 함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성만찬에 사용할 음식을 각자 준비해 왔습니다. 부자는 풍성하게 빈자는 빈약하게 주인은 종들이 준비한 것으로 종은 자신이 먹을만한 모자란 음식으로 가져왔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만찬을 할 때에 현재의 도시락처럼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자신이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교회 안에서도 취하고 배불렀으며, 빈자는 예배 후에도 시장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주인들은 편안히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먹음으로 시간에 문제가 없었지만 주인의 음식까지 준비하던 종들은 마치고 해야할 일 때문에 시간이 모잘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며 꾸짖었습니다.

바울이 바라본 주님의 성찬은 나눔의 의식입니다. 주님이 몸과 피를 나눴듯이 교회 안에서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계급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는 평등한 공동체의 현장입니다. 우리나라도 종은 주인들과 한상에서 먹지 못했는데 주님은 2천년전 모든 사람은 한 상 즉 성찬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에는 선교사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는데 종들을 같은 상에 먹게 하는 선교사의 따뜻함에 감동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성찬은 회복입니다. 성찬은 나눔입니다. 성찬은 함께 밥상에 앉는 행위입니다. 김지하 시인이 밥은 하늘이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성찬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 모두에게 하나된 밥상에서 하나된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이 주님의 진심어린 마음을 따라 참된 나눔의 현장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을 통하여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만찬의 날을 기념하면서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떡과 잔을 나눔은 매일의 일상의 식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떡과 잔이지만 우리에겐 밥과 국 또는 밥과 찌개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몸과 피를 주셨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생을 품고 이 땅에 서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먹던지 무엇을 마시던지 주님의 온몸을 나누셨던 뜨거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나눔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YoungYeon
나눔이 가능 한 것은 "사랑"때문입니다. 엄마가 짜장면이 싫어서 안먹은게 아니라 자식이 먹는게 더 행복했으므로 자신은 구경만, 물론 풍족한 형편이었다면 다르겠지만, 없는가운데 좋은 것을 양보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이미 주님께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선물을 줄때도 내가 쓰기에도 아까운 좋은 것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버리긴 아깝고 내가 쓰긴 싫은 걸 주는지...그 사람의 영성을 볼수있죠.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물론, 사망 권세 이기신 분이지만, 그분의 그 처참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인간은 하나밖에 안가진 바로 그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
크리스챤들이 더 사회에 모범이 되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아~예수님 믿는 사람이구나 알아볼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하루도 힘내서 서로 사랑하기에 바쁜 시간들 보내길 기도합니다.

@canon7
유월절이 시작하는 첫날 화요일에 유월절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행하는 모든 방법데로 실시를 했는데 정말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유월절 세데르에는 예수그리스도와 그 언약 약속이 담겨 있고 그 세데르 만찬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만찬이였습니다. 첫 시작은 촛불을 키는 것 부터 시작하더군요 집사님이 예수그리도가 빛으로 우리가운데 비추는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가운데 항상 원망하고 까먹은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 때 이 만찬을 나누시고 십자가길로 가신것을 보게 됩니다. 유월절은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즐겁게 그 유월절을 지내지만 그들에게 행할고 하셨던 그 일을 기념하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난한 자를 함께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빠져 있고 자신들의 파티를 즐기는데 연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날의 기념하고 해야 할 그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이웃을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님의그  말씀을 생각하지 않는 그 모습을 경고하며 그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죄를 짓는거라고 말씀 하십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항상 내가 먼저였고 나 자심만 괜찮으면 즐거우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eripu
성찬의 이유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찬이 너무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는데, 그 죽으심을 얼마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도 얼마나 기념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에서 까지요) 단지 위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떡과 잔만을 나누어야 예수님의 성찬인지, 정말 우리 삶속에서 서로 나누고 베풀어 주면서 주님의 성찬을 기념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십자가를 계속 기억하고 그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신 그 큰 은혜도 우리가 기념하게 하소서!

@jk3647
그동안 자신에게 거짓된 성찬을 한건 아닌지 생각하게됩니다.

@zibanitu83
자신의 몸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피를 흘려 새 언약,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셨는데도 옛사람의 모습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보시고 주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다른 곳도 아닌 그 예수님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나도 예배하는 가운데서, 보내심을 받은 세상에서 경솔하게 행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심을 기억하고 그와 같이 사랑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gracelim7
고대의 풍습 중 사람을 먹는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람만의 고유한 기질을 소유하게 된다고 믿었다 합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며 떡과 포도주를 몸으로 비유하시는 장면도 이제 육신으로는 죽으시지만 부활하실 그 분의 성품을 우리 안에 담고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히는 꼭 그렇게 되어져야만 하지요.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신 그 분이 가신길을 가길 원합니다.

@IM_Zaya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만찬의 행위가 언제부터인가 그냥 습관적인 행위가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그냥 고난주간에는 의무적으로 특별 새벽 기도에 참석해야하고 부활절이 되면 행사 치르기에 바쁘기만 하지 정작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은 고난도 부활도 하지 않고 계신듯 합니다. 성만찬의 시간을 통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G_Park01
고난주간입니다. 정말 마음을 치는 말씀들을 많이 읽고 듣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제 삶의 도구로 쓰고있는것은 아닌지 회개했습니다. 본말전도의 기복신앙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주셨으면 합니다.

@hayea00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매달 첫째주는 성찬주일로 보냅니다.
성찬을 땔 때마다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성경 구절이라, 더욱더 감동이 새롭습니다.
매달 성찬을 하면서도, 주님을 세상에 전도하지 않는 저를 회개합니다.
마음을 새롭게하여, 성찬을 떼는 부활 주일을 보내야겠습니다.

@starlica
저도 @IM_Zaya 님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사가 되는게 아닌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graceviky
의례적 행사가 아닌 성만찬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 우리죄를 더욱더 철저히 회개해야겠습니다.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트위스티벌 서울 자원봉사자 모임 안내입니다.

트위시티벌 서울 자원봉사로 지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자원봉사 전체 팀장을 맡은 @hanbaek 입니다.
이번 행사에 70명에 가까운 분이 자원봉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저희가 보다 아름다운 헌신을 하기 위해서 자원봉사 사전 모임을 실시합니다.
사전모임을 통해서 전체 그림도 함께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방안도 나눴으면 합니다.

일시 : 2010년 3월 20일(토) 오후 5시
장소 : 트윗방송국 사무실 (혜화역 1번 출구 학전그린극장 5층)
대상 : 자원봉사자와 행사집행부
약도 :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22-26(3월 18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hanbaek
주님께서 허락하신 만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날 성만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경험입니다. 이는 주님이 처음 성찬을 행하신 이후부터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같은 의미를 가지고 지켜오는 귀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성례라 부르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일곱가지 성례가 있지만 개신교는 단 두개의 성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세례식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이렇듯 성찬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늘 기억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혜로운 행사입니다.

그런데 성찬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는 주요한 근거였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명분을 제공한게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Holy Kiss 입니다. 신약성경에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입맞춤은 기독교인들이 동성연예자라는 비난을 가져왔습니다. 이교도의 시각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비밀집회를 하는 동성연예자들의 집단이라고 폄하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훨씬더 기독교인을 힘겹게 한 예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시에 성찬을 행하면서 주님의 몸을 먹으며 주님의 피를 마신다고 말하면서 붉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를 목격한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를 죽여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의식을 행한다고 말하였고, 실제로 이 소문이 퍼져서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기에 픽박하고 십자가에서 죽이는걸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찬의 잘못된 소문으로 죽어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을 중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중지하거나 폐지할만도 한데 기독인들은 이 예식을 계속 거행했으며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성찬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성찬을 초기 기독인들은 지키고자 했을까요?
성찬식은 무엇보다도 주님이 직접 행하시고 행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다룬 다룬 성경본문은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행하신 성찬을 따라서 주님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순결함을 핍박의 상황에서도 초대 믿음의 선배들은 지켜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내가 먹고 주님의 피를 내가 마시고 있음을 상기해 줍니다. 주님의 대속의 몸과 피로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아름다운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성찬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주님이 직접 자신을 나누시는 섬김을 앞선 신앙인들은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차례임을 가르켜줍니다. 주님이 몸과 피를 나누셨듯이 이제 우리도 우리의 몸과 피를 나눠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나누고 감사와 감격을 나누고 내게 주신 달란트와 물질을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나눔이 있는 현장에 주님의 성찬은 또 다시 구현되고 우리의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다시금 성찬의 기쁨이 임하심을 믿습니다.

성찬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성찬을 받음을 감격하면서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10-2(3월 17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hanbaek
오늘 본문에는 유다라는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제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3년이나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한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여기에 관한 수수께끼에 대하여 묵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가롯유다는 주님의 돈주머니를 맡아서 관리할 정도로 인정을 받은 제자입니다. 원래 회계는 가장 확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주로 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토록 신뢰하던 제자가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돈이 탐나서라고 주장하는 건 조금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 30냥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았다면 다시 돌려주러 가지는 않았을꺼라는 추측입니다. 게다가 회계를 맡았던 유다니까 돈을 들고 튀어라에 맞게 횡령함이 더 쉽고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성경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파는건 사탄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자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신 주님이 끝까지 가고자 하시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그 길을 가는 악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지시로 이 일을 한걸까요? 아니면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인도한 사람이 되는걸까요?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유다에게 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뻔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로서는 정말 최악을 선택을 하였음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마음을 다룬 뮤지컬이 Jesus Christ Super Star 입니다. 이 뮤지컬에서 유다는 "Why Me?"라고 애젋게 외칩니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하필 왜 저를 택해서 가장 나쁜 악역을 맡기셨습니까? 저가 아니라도 누군가 이 시점에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왜 하필 저입니까? 하는 외침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절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합니다. 단지 사탄의 꼬임에 빠졌다라고 해석하면 유다가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존재로 해석되기 때문에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가장 유력한 설은 유다는 헤롯당원이었기에 예수님을 팔았다 입니다. 가롯유다는 로마의 폭정으로부터 예수께서 해방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입니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달렸고 주님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확신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주님이 오실 때에 가장 기대에 부풀었고 주님이 이제 왕이 되실 때 목숨걸고 투쟁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라리 하시고 자신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시니 억장이 무너졌고 그는 마지막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을 팔면 예수께서 결국 투쟁모드에 돌입하실 것이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여 전쟁을 일으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스스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자 유다는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하고 맙니다.

이러한 해석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감이 가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의 문제는 예수님을 자신이 조정하려 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입니다. 우리도 자주 주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며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마음에 우리를 맞춰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건 주님의 마음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오늘도 주님보다 앞서지 마시고 주님의 길을 따라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hayea00
보통 우리는 가장 믿는 사람에게 금전 관리를 맡깁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유다는 그런 금전을 맡았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가롯유다 였지만, 결국 사탄의 유혹으로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게됩니다.

사람은 너무나 나약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오늘도 기도하며 믿음을 굳혀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graceviky
가롯유다는 어찌보면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유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저도 제 욕심때문에 때로는 예수님을 팝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협하고 합의합니다.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것을 기억 하며.. 사탄의 유혹의 빠져 예수님을 팔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qrafzv80
목사님의 묵상글 읽어보면서 많이 생각해봅니다. 물론 상상이지만...'why me?'의 담긴 유다의 심정이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저 역시 가끔은 일이 꼬였을 때, 나를 이 쪽으로 몰고 간 게 하나님인지, 사탄인지, 고민해볼 때가 많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신감을 느낄 때도 간혹 있습니다. 저 상황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유다는 저 역할을 벗어날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owlnme
저는 가롯유다의 잘못을 예수님과 잠시 떼어놓고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와 가롯유다를 비교해 보면 가롯유다같은 자가 '감히'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만 생각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위 사람들을 조정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할때가 많은것 같습니다. 내가 섬기는 자리에 가지 못하고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정치인을, 국민을 조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요. 솔직히 앞에서 부탁하거나 의논하지 못하고 뒤에서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이겠지 하는 마음. 정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마음이요. 내가 하나님처럼 굴려고 하는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만과 사랑의 부족이 가롯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게 만들었던 것 아닐까요? 가롯유다의 걸음은 어찌보면 그저 작은 걸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커다란 배의 작은 키가 커다란 배를 움직이는 것처럼. 가롯유다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것, 그분을 믿을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길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zibanitu83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장면은 영화나 뮤지컬 등의 공연, 심지어 글이나 대화 속에서 일반적인 “배신”의 비유로 사용될 때마다 유독 드라마틱하게 표현되는 데에 비해, 성경말씀에서 대하니 오히려 가롯 유다의 모습에서 주님에게 등돌리는 다른 여러 인물들과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되는 “그리스도를 다시 못박는 사람”이 유별나게 악독한 특정인이 아닌 나약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보게 되네요. 인정받고 신뢰받는 자리에 있게 될수록 더욱 낮아지는 내가 되길 원합니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월절 객실을 성실하게 준비한 두 제자 같이 묵묵히 신실한 신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danielgo76
가롯유다의 독백 : "당신이 두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를 위한 당신과 당신을 위한 당신.."
우리 크리스찬에겐 이런 고백이 있으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엔 이런 울림으로 시험들고 고통한다고 봅니다. 우리 맘엔 유다의 모습이 항상 있지만 말씀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묵상합니다^^

@gracelim7
겉으로 보기에는 유다가 악역을 맡았고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똑똑한 제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가르친 것들을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고 그 위에 자신이 만든 우상으로 세운 메시아가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진짜 메시아를 팔아넘긴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그 때야 비로소 진정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이 너무나 무거워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만든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허물고 오직 성경 말씀에 비추어 진정한 주님의 의를 구하는 하루 되기를 소망합니다.

@canon7
예수님은 그 끝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끝을 알면 잘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나는 그 끝이 좋은 상태면 어차피 나는 뭘해도 되 하면서 편하게 살았을 거고 그 끝이 안좋은 상태이면 난 뭘해도 안되니깐 하고 막살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끝을 알고도 그분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셨습니다. 비아돌로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길이 아니라 그의 생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고 그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가운데 언제나 어린양 처럼 순종하며 가신 것을 생각하며 이번달 그 예수님의 걸음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동행하고자 합니다. 가롯유다와 관련되서 이 복음서에 있는 다른 구절들을 묵상하다 보면 나의 모습에 비춰 보게 됩니다.  언제나 가롯유다는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건은 물질에 대한 돈에 대한 욕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마음 이였지만 또한 그가 감당해야 일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너의 행할일을 하라라고 허락 하셨을 때 사탄이 가롯유다에 마음에 들어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팝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언약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회복되고 다시 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 간건 가롯유다 뿐만 아니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고난고 십자가에 달리심을 얘기했을 때 베드로가 그의 혈기 있는 성질대로 나의 칼로 그것을 막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꾸짓으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였지만 가롯유다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서 자괴감에 빠져서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됩니다. 나의 삶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죄를 지고 두려워 하지만 회개와 그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나의 죄를 덮고 나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내가 되어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죄를 짓지 않도록 항상 내 자신을 하나님과 친밀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pullipggot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가시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길을 그토록 잘 알고 계시면서도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실 수 있는지 제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주님앞에 엎드러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저를 바라봅니다. 가룟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자기 스스로를 위한 주님' 으로 만들어 놓고 조정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게도 있습니다. 제 마음의 왕좌에 주님을 모시겠다고 고백했는데 어느새 이런모습의 저를 발견합니다. 사탄이 저를 이용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겠습니다.

@YoungYeon
누구나 삶에 넘어질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삶에서 넘어지면서 그 좋은 머리를 악한곳에 쓴거죠. 그러나 그에겐 부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내버립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 주님은 그도 마지막 만찬에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전 속이 좁아 안 좋아하는 사람과 밥도 못먹고, 혹시 먹더라도 체하고 토하고 그러는 밴댕이 속알딱지입니다. 주님은 전혀 그런분이 아니시죠. 오늘 나의 삶에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을 몰아냅니다. 세상 불의에 침묵하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뺏다시피 하여 방탕한 삶을 살다 거지만도 못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나아오더라도 기쁘게 맞아주시며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주님의 사랑를 감사하는 하루 되길 바랍니다.

@eripu
드디어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는군요. 그리고 이루어지는 가룟 유다의 배반, 예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참혹한 죽음이 예수님을 향하여 예비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자신의 잔으로 받아드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도 끝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시고, 결국 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친구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말씀이 뒷받침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기 위해 객실을 준비하십니다. 그 객실의 준비까지도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어떻게 따라가서 자리를 잡을 것인지까지 아주 세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러한 일이 일어날것을 이미 알았다는듯이 정확하게 찝어서 말하셨고,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창 1). 그리고 마주한 마지막 유월절 만찬. 그리고 첫 성찬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3-9(3월 16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hanbaek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
주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인이 찾아와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으로 300데나리온이나 하였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룻 품삵이므로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향유의 가격은 천오백만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이는 누가 보아도 낭비적 요소가 강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사실 향수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향수는 향기가 많이 나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향수를 쓸 때에는 스프레이로 조금 뿌리거나 한두방울 뭍혀서 사용합니다. 그런 강한 향기가 나는 물건은 병채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으니 그 냄새가 얼마나 강할까 생각해 봅니다. 식사시간에 그토록 강한 향을 뿌리면 좋은걸 떠나 역겹게 되고 게다가 그 향수를 통채로 뒤집어 쓴 주님은 강한 냄새로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오늘 행한 행동은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왜냐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대로 주님께 통채로 드려서 주님이 그걸 처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게 하시든지 아니면 주님께 한두방울 발라드리고 나머지는 평생 꼭 사용하시라고 말씀드리며 전달하는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을 이런 행동을 하였고 주님은 책망은 커녕 여인을 두둔하고 칭찬하였을까 하는 고민을 해봤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은 감격에찬 모습입니다. 주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은데 가진것 전부를 그저 쏟아부어 주님께 드리는 모습입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 어떻게 하는게 주님이 더 기뻐하실지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뵈었다는 감격에 찬 그녀는 바로 오늘 주님께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걸 드리고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가장 귀하신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가 바라는건 칭찬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감격을 최선을 다해 몸으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주님이 보신건 바로 그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향해 느끼는 감격과 주님을 향한 애젋은 사랑을 주님은 아셨기에 그녀의 모든 행동을 감싸주셨고 자신의 장례까지 준비하였다 칭찬했으며 심지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 높이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 언제나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면 주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주님께 받은 감격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 칭찬과 높임 받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YoungYeon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알았고, 미리 그 향유를 준비한 듯 합니다. 요즘 처럼 명품관 가서 돈주고 그런 향유를 바로 살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때가 얼마 안남은 걸 알고,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무례인줄 알면서도 온맘을 다해 주님께 쏟아 놓네요. 주님이 그맘을 아시고 기뻐하시네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니.
사람들은 선한 일에 그 돈을 쓰라고 하지만 그들이 선한일을 즐겨해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니라, 마음이 인색해서 그런거 같습니다. 귀한것을 귀한 분께 드리는게 당연한데, 아까워하네요. 주님 한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데, 그분께 드리는거 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니까요!.
오늘 나는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graceviky
만약 제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귀한걸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릴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기 전에.. 전 제 욕심이 앞서. 그 상황속에서도 머리속으론 계산을 했을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향유 부은 여자를 귀히 여기시는 것 처럼 저도 예수님께서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되어 진정 주!라고 고백하는 내가 되기 원합니다.

@hayea00
처음 마음은 하나님 마음, 나중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타협하지 말고, 소중한것을 주님께 드릴줄 아는 제가 되고 싶습니다.

@canon7
우리집에 나드향으로 된 오일이 있다 정말 향기롭다 그리고 많이도 아니고 한방울만 적셔도 온향기가 집안 구석 구석 퍼진다. 그 향기안에 있으면 정말 내 몸의 모든 불결한 냄새가 감춰지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런 옥합 전체를 부은 걸 보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대인의 왕이며 메시아임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랍비 또는 선지자 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여인 만은 그 분이 메시아이시며 유대인의 왕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사해주실 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힘을 다해서 이제 얼마 있지 않을 예수님을 위해서 경배드리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이 퍼질때에 이여인의 행한일도 같이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유대인들은 몰랐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왕이시며 메시아 시라는 것을 그런데 동방박사와 이 여인은 알았다. 그리고 경배드린다. 예수님이 짐어지고 가실 그 십자가에 대해서 그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이땅의 오신 하나님의 본체 이심을 본다. 이 보잘것없는 이방인에게도 아버지의 일에 잔을 옮기지 않고 동참하게 하시고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했다. 그리고 저 여인의 옥합을 보면서 그 중심으로 하나님임을 알고 그 모든것을 털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을 드려서 예수님을 충족하게 해 드렸듯이 나도 그 여인처럼 이순간 가장 좋은 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너의 물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 처럼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기도의 산제물로 드려야 겠다. 이번 한달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달 되어야 겠다.

@miyaung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저에게 원하는 시는 것을 자꾸 내가 원하는 방법안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부끄러워 집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한게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다시한번 깨닫고 무엇을 하던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건 나의 생각이 아닌 아버지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늘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귀 기울 수 있게되길 기도합니다.

@julie0429
여러번 읽고 설교말씀으로도 들었던 오늘 말씀...
나에게 과연 향유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고 싶네요. 가족? 친구? 월급?ㅎㅎ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한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해 나에게 소중한 것, 그분을 높일 수 있는 것을 드린다면,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른다 해도 주님만은 아실테니까요.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매일 매일 기도하며 준비해 보겠습니다.

@johnwoolim
사랑의 교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의 예배당이 좁아서 더 큰 교회를 건축해야하는 그 상황...
그 상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이 아닌 사회문제로 평가되는 현실에서는
그 보다 아이티를 돕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얼마전 아이티에 교회를 세운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네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이 상황을 어떻게 말씀하고 싶으실까요?

우선은 본문 말씀을 따라 내가 만약 그 때 그 여인이었다면 내게 소중한 그 향유를 부었을까요?
상당히 고민했을 껍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재산을 팔았지만 욕심이 눈을 가렸던 그 부부처럼..
1/3정도는 다른 병에 담아두고 깨뜨릴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 같습니다. 저 참 치사하죠. ㅠ.ㅠ
하지만 온전히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아마 다 드렸을껍니다. 다 드리지 않는다면 안 드리느니만 못하니까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생각합니다.
향유를 깨뜨린 그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예비했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예비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좀던 편히 앉아서 예배할 수 있는 예배공간을 예비해야할까요?
천년만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예배하기 위해서...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기도와 정성, 시간을 내어야 할까요?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예배당은 없어도 예배의 마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은 지금이 아니면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사랑의 교회가 예배당 만든 것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이것보다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사랑의 교회의 섬김과 선행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씀은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변변한 재물이 없는 것이 부족하구요.
물질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능력을 기꺼이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생각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스럽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gracelim7 자신의 의를 두둔하여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과 오직 주님의 의를 마음에 두고 행하는 행동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어떤 일을 행할 때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분별하며,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그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판단하며 그러한 판단을 함으로 내 안의 어떤 자아가 교만의 고개를 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겠습니다. 내 안의 자아라는 우상을 허물고 마음의 중심을 주님에 맞추어 그 안에서 그 분의 의만를 구하는 삶만 살기를 소망합니다.

@manga0713
이것 아님 안된다는 것이 분명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마저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eripu
삼백 데나리온.. 을 내려 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돈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면 그렇게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에 따라 우리의 생각 마저도 달라집니다. 드리고 드려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모두 드리는 것이고, 아니다, 이 정도 드리면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고 멈춘다면 우리의 신앙도 멈추게 됩니다. 영원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기억하기 위하여 노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영영히 기록되기 위하여 노력하시겠습니까?

@owlnme
일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귀한 것을 쏟아붓는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 까요? 그는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사함을 많이 받아 그 사랑이 많은 연고라고 했고요. 오늘 구절의 바로 뒤를 보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준비에 분주한 모습입니다. 여인이 향유를 붓는 것과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모습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한 사건과 연결지어집니다. 두 사람 모두 어쩌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머리가 좋고 셈이 빨랐던 가롯유다와 향유의 값도 생각않고 들이부을 수 있던 여인의 사랑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저는 애니어그램으로 보면 무척 생각이 많은 측 사람입니다. 머릿속으로 늘 재고 움추리고를 반복하는 달팽이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무조건 들이대고보는 열정을 갖고 싶습니다. 현재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 일이 큰 실수 일 때도 있고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을까.. 기특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늘 후자의 선택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만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2:38-44(3월15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hanbaek
본문에는 주님이 행하신 참 이상한 일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헌금함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건 결국 헌금함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앉았으니 제자들도 뒤에 섰을 것이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헌금함 앞에서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상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몇번이곤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왜 주님은 헌금함 앞에서 그렇게 서서 사람들이 헌금하는걸 지켜보셨을까요? 또 주님이 서 있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다보면 본문이 즐겁게 다가옵니다. 주님이 지키고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사람들을 세종류라 생각됩니다.

1) 자랑스럽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자신은 나름 큰 돈을 헌금하기에 주님이 보시는게 뿌듯하고 더 많은 사람이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듯 당당하게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상을 이미 땅에서 다 받았느니라.
2) 어물쩡하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니 원래 자신이 드리려던 헌금이 너무 작아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약간 금액을 조정하거나 차라리 헌금함을 피해 갑니다. 나중에 드리던지 아니면 그냥 잊어 버리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도 이러한 부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원짜리 꺼냈다가 색깔을 바꾸어 드리거나 험금드리는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할겁니다. 주님 앞에서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건 주님이 보신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주님이 보실 때에는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마음이 주변의 환경에 있다고 진단하십니다. 직분을 받고 자신의 헌금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선거에 나가기라도 하게 되면 더 큰 헌금을 하게 되는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 그냥 아무일 없는 듯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 참 드분 경우의 사람입니다. 너무나 얼굴이 두껍든지 아니면 진실한 헌금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의 경우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과부는 두렙돈이 땡그렁 소리나는 부끄러워보이는 헌금을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도 당당하게 드렸습니다. 자신이 얼마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정성과 진심을 담은 과부의 헌금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 나를 드릴 때 이 과부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시간을 드리거나 재능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리거나 우리의 시선이 이 땅의 상급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받으시고 하늘의 복으로 채우시리라 믿습니다. ^^

@hayea00
보여지는 부분이 아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오늘도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julie0429
주님은 참 세심한 분 같습니다. 그리고 참 예리하신 분이신 것 같구요.
하나하나 지켜보시고 판단하시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상급도 내리시고 깨달음도 주시니까요.
자연스레 제 모습도 뒤돌아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꼬박꼬박드리지만 사실 주일헌금은 자주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웬지 한번에 드려도 될 것 같고..말이죠 ;;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큰 것 좋은 것 대단한 것만이 아닌 작고 소소한 부분들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큰 것을 드리려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작은 부분에도 신중을 기하고 진심과 진실함으로 나아가야겠구요. 문득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정말 감사하네요. 오늘도 작은 부분에 진실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

@owlnme
어제는 일곱번 정도 묵상을 입력했다가 웬일인지 다시 들어와보면 저장이 안되어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새벽기도 가야하는데 너무 새벽(12시30분)에 잠깨어 들어와보니 이제는 좀 작성이 되지 싶네요
간혹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시니까요.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숨은 선행을 보시고 '착하다' 하시고, 남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과연 그 칭찬 만큼의 선행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보시겠지요. 만약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보다 그 이전에 저 과부는 어째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을 수 있었을까요? 그 시대의 과부는 아무런 소득의방법이 없었을텐데 어떻게 그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넣을 믿음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과 그 사랑이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지 않았을까요? 삶을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moohando
어제 교회에서 총신대 교수님의 (구원론)강연이 있었는데, 부자 청년과 (악질)세리 삭개오에 대한 비교를 하더군요. 부자청년은 어떤 걸 보더라도 참 모범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했지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삭개오는 예수님 만난 후 자신의 삶이 변하는 장면("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영접했느냐의 차이가 두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기 쉽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는 분("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하반절)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hanbaek 님의 묵상처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아무일 없듯이 헌신"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교회 봉사하는 부분에 있어 암묵적으로라도 자랑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고, 헌금의 액수, 헌신의 정도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고정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manga0713
항상 영광의 자리를 원하는 욕심, 사망으로 인도하는 이 욕심을 없애주옵소서..^^

@YoungYeon
자신의 공을 세상에서 이미 칭찬 다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칭찬이 없는것을 압니다. 오른손이 한느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선한일을 행하면서 주님만 알고 계실꺼라는 생각으로 즐거워하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pullipggot

@tirol70
오늘의 말씀과 목사님의 묵상을 읽으면서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가진 '자의식'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쉽지가 않습니다.

@eripu
오랜만입니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주일까지 마태복음을 나가는 매일성경은 '화 있을진저'로 대표되는 23장을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천국 문을 막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 (마 23:13) 모습들을, 그리고 그들의 온갖 행태를 보시면서 결국은 유다인들의 눈을 완전히 가리시는 선언을 합니다(23:39).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바리새인 이야기는 계속 나옵니다. 아예 그들이 받을 판결이 중할 것이라고(40b) 강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1)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장소에서 윗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기 원하는 교만한 마음과(38b~39) 2) 없는 자에게서 굳이 돈을 빼앗고 (41a), 3) 길게 기도하기는 하나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41b)을 그 이유로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가톨릭에서는 지금도 예배를 하나의 제사로서 강조합니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예물기도).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시죠. 그런데 이 말씀을 그러니까 가난해도 모든 걸 다 드리면 나중에 복을 주신다 식으로 전용해서 해석하는건 말이 안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건 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을 돈이 있는데 그 돈을 구제하는 데 주는 대신 단지 자신이 가지고 아직도 풍족한 가운데 '조금'을 드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단지 가난한 자에게 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이 말씀을 쓰는건 아닌지.. 정말 자비가 필요한 것은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