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3일 토요일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7:24-30 (2월 13일)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hanbaek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평소와 많이 달라 보이십니다. 38년 동안 베데스타연못에 있던 병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쳐달라는 말은 커녕 물이 동하면 자기를 연못에 밀어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연못을 의지하고 연못을 위한 도구로 예수를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자기를 엉뚱한 곳에 이용하려는 사람을 고쳐주시거나 나인성의 과부와 같이 긍휼히 여기시면 누구라도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이 자기 앞에서 무릎꿇고 고쳐달라는 사람을 외면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여인의 요청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여인은 딸을 고쳐달라고 온 정성을 다해 간구했지만 주님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오히려 주님은 여인의 마음에 못을 박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너무나 심해보여서 예수님이 하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주님께 애원하는 불쌍한 여인에게 너희는 개같은 인간이기에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은 너무하는 듯 싶기도 합니다. 왜 주님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전 사실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이 숙제가 풀리지 않아서 또다시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과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주 쉽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설교로 행하여지는 해석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수로보니게 여인로 삼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고백인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에 맞추고 있습니다. 여인의 이러한 믿음이 딸을 구원했으니 우리도 믿음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 쉽게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하면 성경의 주인공이자 묵상의 대상인 주님을 조연으로 끓어내리고 여인이 중심에 서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쉽게 범하는 잘못입니다. 성경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본문에서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주님의 말씀을 빛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럼 다시 묵상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마음에 촛점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이 모진 말씀으로 여인을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에 상황을 생각해보면 주님 곁에는 제자들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속으로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뛰어 들은 것 자체가 사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선은 예수님과 여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어떠한 대화가 오고가는지 주님은 이방인에게 어떻게 행하시는지 촞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믿음과 자신을 향한 철저한 신뢰를 아셨습니다. 그 여인 안에는 어느 유대인 보다 신실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고백하도록 유도합니다.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에서 이방인 여인이 얼마나 진실하고 간절하게 주님을 고백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여인의 고백은 곁에 섰던 유대인들조차 놀라고 감동할만한 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와 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더럽게 생각하였는데 여인의 고백에 의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여인의 믿음을 고백하게 했을 뿐 아니라 곁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길 원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 곁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어느새 신앙의 열정과 헌신을 상실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늘 내가 신앙이 깊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 주님은 이방인과 같은 처음 믿는 신앙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신앙이란 이름의 긴 시간보다도 강렬한 고백과 헌신이 더욱 소중하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여인의 고백을 듣고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을 고백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선택받은 유대인보다 신실한 이방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시 주님 곁에 머문 유대인처럼 이방 여인이 무릎 꿇는걸 교만히 바라보면서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주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진정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저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 곁에 있던 유대인이 아닌 무릎꿇고 간구하는 여인의 삶으로 살아가고자 결단합니다.       


@johnkang0125

오늘 아침도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봅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표현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신랑되신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여인에게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투명스럼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깊은 사랑의 진수를 보게 됩니다.  수천 수억의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해도 전능하신 그분은 오직 나의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시고 계신다는 확신이 드는 본문입니다. 최근 기도하면서도 그분의 길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심을 느껴집니다. 다시한번 믿음으로 전진하는 신앙이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ripu

목사님이 예수님의 시점에서 살펴보라고 하시니 저도 잠깐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차원이냐면요, 예수님께서 다른 복음에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어린 양들 이외에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부분에서입니다. 물론 헬라인이라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헬라인을 만지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도 보지 않으셨을 것이고, 당연히 사마리아에는 가셔서 사마리아인과 상종할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성령으로 이방인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환상을 보낼 리가 없고요. 그런데 왜 굳이 그 여자에게는 그렇게 반응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아직 사랑하셔서가 아닐까요.

백부장의 경우는 유대인이 멸시할 수 없는 로마의 병사였으니 예수님도 그냥 편하게 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경우에는 유대인들과 자주 만나는 시점이 아니니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있는 공간에서, 비유대인이 갑자기 와서 은혜를 청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녀의 구원을 원하신다고 해도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적 Context에서는 '저딴 애들'에게 턱하니 은혜를 배푸면 반드시 그 주위에서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곧바로 난리쳤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적용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상황 콘텍스트에 맞추셔서 베풀어집니다. 그것이 '성육신화'의 복음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에 어떻게, 주위사람에게 어떻게 그들의 상황과 문화에 맞춰서 주님의 복음을 전할지 고민할 일입니다.


@hayea00

여자는 약하나..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생각이 났습니다.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온갖 모욕을 다 들었지만,

그래도 믿음을 굽히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딸이 고침을 받게 합니다.


믿음에는 이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럴때 믿음을 굽히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YoungYeon

예수님이 참 시니컬하게도 말씀하시는데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상처를 받기보다는 자신을 더 낮추고 간절히 구합니다다. 뭔가를 나도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데 원하는 반응이 안나오고 힘든 상황에 부딪치면, 바로 낙담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진정 내가 구하는게 간절하다면 자신을 가장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개도 상아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여인의 고백은 정말 큰 감동을 줍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여인을 마음을 예수님이 누구보다 잘 아시니까요. 어린 양들을 사랑하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