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9일 금요일

트위스티벌 서울 자원봉사자 모임 안내입니다.

트위시티벌 서울 자원봉사로 지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자원봉사 전체 팀장을 맡은 @hanbaek 입니다.
이번 행사에 70명에 가까운 분이 자원봉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저희가 보다 아름다운 헌신을 하기 위해서 자원봉사 사전 모임을 실시합니다.
사전모임을 통해서 전체 그림도 함께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방안도 나눴으면 합니다.

일시 : 2010년 3월 20일(토) 오후 5시
장소 : 트윗방송국 사무실 (혜화역 1번 출구 학전그린극장 5층)
대상 : 자원봉사자와 행사집행부
약도 :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22-26(3월 18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hanbaek
주님께서 허락하신 만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날 성만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경험입니다. 이는 주님이 처음 성찬을 행하신 이후부터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같은 의미를 가지고 지켜오는 귀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성례라 부르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일곱가지 성례가 있지만 개신교는 단 두개의 성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세례식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이렇듯 성찬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늘 기억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혜로운 행사입니다.

그런데 성찬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는 주요한 근거였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명분을 제공한게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Holy Kiss 입니다. 신약성경에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입맞춤은 기독교인들이 동성연예자라는 비난을 가져왔습니다. 이교도의 시각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비밀집회를 하는 동성연예자들의 집단이라고 폄하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훨씬더 기독교인을 힘겹게 한 예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시에 성찬을 행하면서 주님의 몸을 먹으며 주님의 피를 마신다고 말하면서 붉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를 목격한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를 죽여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의식을 행한다고 말하였고, 실제로 이 소문이 퍼져서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기에 픽박하고 십자가에서 죽이는걸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찬의 잘못된 소문으로 죽어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을 중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중지하거나 폐지할만도 한데 기독인들은 이 예식을 계속 거행했으며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성찬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성찬을 초기 기독인들은 지키고자 했을까요?
성찬식은 무엇보다도 주님이 직접 행하시고 행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다룬 다룬 성경본문은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행하신 성찬을 따라서 주님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순결함을 핍박의 상황에서도 초대 믿음의 선배들은 지켜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내가 먹고 주님의 피를 내가 마시고 있음을 상기해 줍니다. 주님의 대속의 몸과 피로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아름다운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성찬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주님이 직접 자신을 나누시는 섬김을 앞선 신앙인들은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차례임을 가르켜줍니다. 주님이 몸과 피를 나누셨듯이 이제 우리도 우리의 몸과 피를 나눠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나누고 감사와 감격을 나누고 내게 주신 달란트와 물질을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나눔이 있는 현장에 주님의 성찬은 또 다시 구현되고 우리의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다시금 성찬의 기쁨이 임하심을 믿습니다.

성찬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성찬을 받음을 감격하면서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10-2(3월 17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hanbaek
오늘 본문에는 유다라는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제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3년이나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한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여기에 관한 수수께끼에 대하여 묵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가롯유다는 주님의 돈주머니를 맡아서 관리할 정도로 인정을 받은 제자입니다. 원래 회계는 가장 확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주로 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토록 신뢰하던 제자가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돈이 탐나서라고 주장하는 건 조금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 30냥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았다면 다시 돌려주러 가지는 않았을꺼라는 추측입니다. 게다가 회계를 맡았던 유다니까 돈을 들고 튀어라에 맞게 횡령함이 더 쉽고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성경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파는건 사탄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자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신 주님이 끝까지 가고자 하시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그 길을 가는 악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지시로 이 일을 한걸까요? 아니면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인도한 사람이 되는걸까요?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유다에게 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뻔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로서는 정말 최악을 선택을 하였음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마음을 다룬 뮤지컬이 Jesus Christ Super Star 입니다. 이 뮤지컬에서 유다는 "Why Me?"라고 애젋게 외칩니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하필 왜 저를 택해서 가장 나쁜 악역을 맡기셨습니까? 저가 아니라도 누군가 이 시점에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왜 하필 저입니까? 하는 외침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절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합니다. 단지 사탄의 꼬임에 빠졌다라고 해석하면 유다가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존재로 해석되기 때문에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가장 유력한 설은 유다는 헤롯당원이었기에 예수님을 팔았다 입니다. 가롯유다는 로마의 폭정으로부터 예수께서 해방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입니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달렸고 주님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확신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주님이 오실 때에 가장 기대에 부풀었고 주님이 이제 왕이 되실 때 목숨걸고 투쟁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라리 하시고 자신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시니 억장이 무너졌고 그는 마지막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을 팔면 예수께서 결국 투쟁모드에 돌입하실 것이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여 전쟁을 일으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스스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자 유다는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하고 맙니다.

이러한 해석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감이 가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의 문제는 예수님을 자신이 조정하려 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입니다. 우리도 자주 주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며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마음에 우리를 맞춰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건 주님의 마음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오늘도 주님보다 앞서지 마시고 주님의 길을 따라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hayea00
보통 우리는 가장 믿는 사람에게 금전 관리를 맡깁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유다는 그런 금전을 맡았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가롯유다 였지만, 결국 사탄의 유혹으로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게됩니다.

사람은 너무나 나약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오늘도 기도하며 믿음을 굳혀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graceviky
가롯유다는 어찌보면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유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저도 제 욕심때문에 때로는 예수님을 팝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협하고 합의합니다.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것을 기억 하며.. 사탄의 유혹의 빠져 예수님을 팔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qrafzv80
목사님의 묵상글 읽어보면서 많이 생각해봅니다. 물론 상상이지만...'why me?'의 담긴 유다의 심정이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저 역시 가끔은 일이 꼬였을 때, 나를 이 쪽으로 몰고 간 게 하나님인지, 사탄인지, 고민해볼 때가 많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신감을 느낄 때도 간혹 있습니다. 저 상황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유다는 저 역할을 벗어날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owlnme
저는 가롯유다의 잘못을 예수님과 잠시 떼어놓고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와 가롯유다를 비교해 보면 가롯유다같은 자가 '감히'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만 생각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위 사람들을 조정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할때가 많은것 같습니다. 내가 섬기는 자리에 가지 못하고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정치인을, 국민을 조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요. 솔직히 앞에서 부탁하거나 의논하지 못하고 뒤에서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이겠지 하는 마음. 정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마음이요. 내가 하나님처럼 굴려고 하는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만과 사랑의 부족이 가롯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게 만들었던 것 아닐까요? 가롯유다의 걸음은 어찌보면 그저 작은 걸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커다란 배의 작은 키가 커다란 배를 움직이는 것처럼. 가롯유다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것, 그분을 믿을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길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zibanitu83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장면은 영화나 뮤지컬 등의 공연, 심지어 글이나 대화 속에서 일반적인 “배신”의 비유로 사용될 때마다 유독 드라마틱하게 표현되는 데에 비해, 성경말씀에서 대하니 오히려 가롯 유다의 모습에서 주님에게 등돌리는 다른 여러 인물들과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되는 “그리스도를 다시 못박는 사람”이 유별나게 악독한 특정인이 아닌 나약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보게 되네요. 인정받고 신뢰받는 자리에 있게 될수록 더욱 낮아지는 내가 되길 원합니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월절 객실을 성실하게 준비한 두 제자 같이 묵묵히 신실한 신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danielgo76
가롯유다의 독백 : "당신이 두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를 위한 당신과 당신을 위한 당신.."
우리 크리스찬에겐 이런 고백이 있으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엔 이런 울림으로 시험들고 고통한다고 봅니다. 우리 맘엔 유다의 모습이 항상 있지만 말씀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묵상합니다^^

@gracelim7
겉으로 보기에는 유다가 악역을 맡았고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똑똑한 제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가르친 것들을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고 그 위에 자신이 만든 우상으로 세운 메시아가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진짜 메시아를 팔아넘긴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그 때야 비로소 진정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이 너무나 무거워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만든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허물고 오직 성경 말씀에 비추어 진정한 주님의 의를 구하는 하루 되기를 소망합니다.

@canon7
예수님은 그 끝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끝을 알면 잘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나는 그 끝이 좋은 상태면 어차피 나는 뭘해도 되 하면서 편하게 살았을 거고 그 끝이 안좋은 상태이면 난 뭘해도 안되니깐 하고 막살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끝을 알고도 그분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셨습니다. 비아돌로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길이 아니라 그의 생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고 그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가운데 언제나 어린양 처럼 순종하며 가신 것을 생각하며 이번달 그 예수님의 걸음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동행하고자 합니다. 가롯유다와 관련되서 이 복음서에 있는 다른 구절들을 묵상하다 보면 나의 모습에 비춰 보게 됩니다.  언제나 가롯유다는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건은 물질에 대한 돈에 대한 욕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마음 이였지만 또한 그가 감당해야 일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너의 행할일을 하라라고 허락 하셨을 때 사탄이 가롯유다에 마음에 들어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팝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언약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회복되고 다시 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 간건 가롯유다 뿐만 아니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고난고 십자가에 달리심을 얘기했을 때 베드로가 그의 혈기 있는 성질대로 나의 칼로 그것을 막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꾸짓으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였지만 가롯유다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서 자괴감에 빠져서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됩니다. 나의 삶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죄를 지고 두려워 하지만 회개와 그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나의 죄를 덮고 나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내가 되어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죄를 짓지 않도록 항상 내 자신을 하나님과 친밀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pullipggot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가시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길을 그토록 잘 알고 계시면서도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실 수 있는지 제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주님앞에 엎드러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저를 바라봅니다. 가룟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자기 스스로를 위한 주님' 으로 만들어 놓고 조정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게도 있습니다. 제 마음의 왕좌에 주님을 모시겠다고 고백했는데 어느새 이런모습의 저를 발견합니다. 사탄이 저를 이용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겠습니다.

@YoungYeon
누구나 삶에 넘어질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삶에서 넘어지면서 그 좋은 머리를 악한곳에 쓴거죠. 그러나 그에겐 부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내버립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 주님은 그도 마지막 만찬에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전 속이 좁아 안 좋아하는 사람과 밥도 못먹고, 혹시 먹더라도 체하고 토하고 그러는 밴댕이 속알딱지입니다. 주님은 전혀 그런분이 아니시죠. 오늘 나의 삶에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을 몰아냅니다. 세상 불의에 침묵하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뺏다시피 하여 방탕한 삶을 살다 거지만도 못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나아오더라도 기쁘게 맞아주시며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주님의 사랑를 감사하는 하루 되길 바랍니다.

@eripu
드디어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는군요. 그리고 이루어지는 가룟 유다의 배반, 예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참혹한 죽음이 예수님을 향하여 예비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자신의 잔으로 받아드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도 끝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시고, 결국 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친구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말씀이 뒷받침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기 위해 객실을 준비하십니다. 그 객실의 준비까지도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어떻게 따라가서 자리를 잡을 것인지까지 아주 세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러한 일이 일어날것을 이미 알았다는듯이 정확하게 찝어서 말하셨고,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창 1). 그리고 마주한 마지막 유월절 만찬. 그리고 첫 성찬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4:3-9(3월 16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hanbaek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
주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인이 찾아와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으로 300데나리온이나 하였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룻 품삵이므로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향유의 가격은 천오백만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이는 누가 보아도 낭비적 요소가 강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사실 향수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향수는 향기가 많이 나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향수를 쓸 때에는 스프레이로 조금 뿌리거나 한두방울 뭍혀서 사용합니다. 그런 강한 향기가 나는 물건은 병채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으니 그 냄새가 얼마나 강할까 생각해 봅니다. 식사시간에 그토록 강한 향을 뿌리면 좋은걸 떠나 역겹게 되고 게다가 그 향수를 통채로 뒤집어 쓴 주님은 강한 냄새로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오늘 행한 행동은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왜냐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대로 주님께 통채로 드려서 주님이 그걸 처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게 하시든지 아니면 주님께 한두방울 발라드리고 나머지는 평생 꼭 사용하시라고 말씀드리며 전달하는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을 이런 행동을 하였고 주님은 책망은 커녕 여인을 두둔하고 칭찬하였을까 하는 고민을 해봤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은 감격에찬 모습입니다. 주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은데 가진것 전부를 그저 쏟아부어 주님께 드리는 모습입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 어떻게 하는게 주님이 더 기뻐하실지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뵈었다는 감격에 찬 그녀는 바로 오늘 주님께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걸 드리고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가장 귀하신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가 바라는건 칭찬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감격을 최선을 다해 몸으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주님이 보신건 바로 그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향해 느끼는 감격과 주님을 향한 애젋은 사랑을 주님은 아셨기에 그녀의 모든 행동을 감싸주셨고 자신의 장례까지 준비하였다 칭찬했으며 심지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 높이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 언제나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면 주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주님께 받은 감격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 칭찬과 높임 받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YoungYeon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알았고, 미리 그 향유를 준비한 듯 합니다. 요즘 처럼 명품관 가서 돈주고 그런 향유를 바로 살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때가 얼마 안남은 걸 알고,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무례인줄 알면서도 온맘을 다해 주님께 쏟아 놓네요. 주님이 그맘을 아시고 기뻐하시네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니.
사람들은 선한 일에 그 돈을 쓰라고 하지만 그들이 선한일을 즐겨해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니라, 마음이 인색해서 그런거 같습니다. 귀한것을 귀한 분께 드리는게 당연한데, 아까워하네요. 주님 한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데, 그분께 드리는거 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니까요!.
오늘 나는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graceviky
만약 제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귀한걸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릴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기 전에.. 전 제 욕심이 앞서. 그 상황속에서도 머리속으론 계산을 했을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향유 부은 여자를 귀히 여기시는 것 처럼 저도 예수님께서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되어 진정 주!라고 고백하는 내가 되기 원합니다.

@hayea00
처음 마음은 하나님 마음, 나중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타협하지 말고, 소중한것을 주님께 드릴줄 아는 제가 되고 싶습니다.

@canon7
우리집에 나드향으로 된 오일이 있다 정말 향기롭다 그리고 많이도 아니고 한방울만 적셔도 온향기가 집안 구석 구석 퍼진다. 그 향기안에 있으면 정말 내 몸의 모든 불결한 냄새가 감춰지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런 옥합 전체를 부은 걸 보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대인의 왕이며 메시아임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랍비 또는 선지자 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여인 만은 그 분이 메시아이시며 유대인의 왕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사해주실 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힘을 다해서 이제 얼마 있지 않을 예수님을 위해서 경배드리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이 퍼질때에 이여인의 행한일도 같이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유대인들은 몰랐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왕이시며 메시아 시라는 것을 그런데 동방박사와 이 여인은 알았다. 그리고 경배드린다. 예수님이 짐어지고 가실 그 십자가에 대해서 그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이땅의 오신 하나님의 본체 이심을 본다. 이 보잘것없는 이방인에게도 아버지의 일에 잔을 옮기지 않고 동참하게 하시고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했다. 그리고 저 여인의 옥합을 보면서 그 중심으로 하나님임을 알고 그 모든것을 털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을 드려서 예수님을 충족하게 해 드렸듯이 나도 그 여인처럼 이순간 가장 좋은 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너의 물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 처럼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기도의 산제물로 드려야 겠다. 이번 한달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달 되어야 겠다.

@miyaung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저에게 원하는 시는 것을 자꾸 내가 원하는 방법안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부끄러워 집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한게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다시한번 깨닫고 무엇을 하던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건 나의 생각이 아닌 아버지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늘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귀 기울 수 있게되길 기도합니다.

@julie0429
여러번 읽고 설교말씀으로도 들었던 오늘 말씀...
나에게 과연 향유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고 싶네요. 가족? 친구? 월급?ㅎㅎ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한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해 나에게 소중한 것, 그분을 높일 수 있는 것을 드린다면,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른다 해도 주님만은 아실테니까요.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매일 매일 기도하며 준비해 보겠습니다.

@johnwoolim
사랑의 교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의 예배당이 좁아서 더 큰 교회를 건축해야하는 그 상황...
그 상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이 아닌 사회문제로 평가되는 현실에서는
그 보다 아이티를 돕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얼마전 아이티에 교회를 세운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네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이 상황을 어떻게 말씀하고 싶으실까요?

우선은 본문 말씀을 따라 내가 만약 그 때 그 여인이었다면 내게 소중한 그 향유를 부었을까요?
상당히 고민했을 껍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재산을 팔았지만 욕심이 눈을 가렸던 그 부부처럼..
1/3정도는 다른 병에 담아두고 깨뜨릴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 같습니다. 저 참 치사하죠. ㅠ.ㅠ
하지만 온전히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아마 다 드렸을껍니다. 다 드리지 않는다면 안 드리느니만 못하니까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생각합니다.
향유를 깨뜨린 그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예비했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예비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좀던 편히 앉아서 예배할 수 있는 예배공간을 예비해야할까요?
천년만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예배하기 위해서...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기도와 정성, 시간을 내어야 할까요?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예배당은 없어도 예배의 마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은 지금이 아니면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사랑의 교회가 예배당 만든 것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이것보다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사랑의 교회의 섬김과 선행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씀은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변변한 재물이 없는 것이 부족하구요.
물질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능력을 기꺼이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생각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스럽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gracelim7 자신의 의를 두둔하여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과 오직 주님의 의를 마음에 두고 행하는 행동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어떤 일을 행할 때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분별하며,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그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판단하며 그러한 판단을 함으로 내 안의 어떤 자아가 교만의 고개를 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겠습니다. 내 안의 자아라는 우상을 허물고 마음의 중심을 주님에 맞추어 그 안에서 그 분의 의만를 구하는 삶만 살기를 소망합니다.

@manga0713
이것 아님 안된다는 것이 분명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마저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eripu
삼백 데나리온.. 을 내려 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돈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면 그렇게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에 따라 우리의 생각 마저도 달라집니다. 드리고 드려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모두 드리는 것이고, 아니다, 이 정도 드리면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고 멈춘다면 우리의 신앙도 멈추게 됩니다. 영원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기억하기 위하여 노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영영히 기록되기 위하여 노력하시겠습니까?

@owlnme
일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귀한 것을 쏟아붓는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 까요? 그는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사함을 많이 받아 그 사랑이 많은 연고라고 했고요. 오늘 구절의 바로 뒤를 보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준비에 분주한 모습입니다. 여인이 향유를 붓는 것과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모습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한 사건과 연결지어집니다. 두 사람 모두 어쩌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머리가 좋고 셈이 빨랐던 가롯유다와 향유의 값도 생각않고 들이부을 수 있던 여인의 사랑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저는 애니어그램으로 보면 무척 생각이 많은 측 사람입니다. 머릿속으로 늘 재고 움추리고를 반복하는 달팽이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무조건 들이대고보는 열정을 갖고 싶습니다. 현재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 일이 큰 실수 일 때도 있고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을까.. 기특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늘 후자의 선택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만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2:38-44(3월15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hanbaek
본문에는 주님이 행하신 참 이상한 일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헌금함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건 결국 헌금함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앉았으니 제자들도 뒤에 섰을 것이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헌금함 앞에서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상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몇번이곤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왜 주님은 헌금함 앞에서 그렇게 서서 사람들이 헌금하는걸 지켜보셨을까요? 또 주님이 서 있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다보면 본문이 즐겁게 다가옵니다. 주님이 지키고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사람들을 세종류라 생각됩니다.

1) 자랑스럽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자신은 나름 큰 돈을 헌금하기에 주님이 보시는게 뿌듯하고 더 많은 사람이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듯 당당하게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상을 이미 땅에서 다 받았느니라.
2) 어물쩡하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니 원래 자신이 드리려던 헌금이 너무 작아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약간 금액을 조정하거나 차라리 헌금함을 피해 갑니다. 나중에 드리던지 아니면 그냥 잊어 버리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도 이러한 부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원짜리 꺼냈다가 색깔을 바꾸어 드리거나 험금드리는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할겁니다. 주님 앞에서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건 주님이 보신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주님이 보실 때에는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마음이 주변의 환경에 있다고 진단하십니다. 직분을 받고 자신의 헌금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선거에 나가기라도 하게 되면 더 큰 헌금을 하게 되는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 그냥 아무일 없는 듯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 참 드분 경우의 사람입니다. 너무나 얼굴이 두껍든지 아니면 진실한 헌금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의 경우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과부는 두렙돈이 땡그렁 소리나는 부끄러워보이는 헌금을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도 당당하게 드렸습니다. 자신이 얼마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정성과 진심을 담은 과부의 헌금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 나를 드릴 때 이 과부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시간을 드리거나 재능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리거나 우리의 시선이 이 땅의 상급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받으시고 하늘의 복으로 채우시리라 믿습니다. ^^

@hayea00
보여지는 부분이 아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오늘도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julie0429
주님은 참 세심한 분 같습니다. 그리고 참 예리하신 분이신 것 같구요.
하나하나 지켜보시고 판단하시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상급도 내리시고 깨달음도 주시니까요.
자연스레 제 모습도 뒤돌아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꼬박꼬박드리지만 사실 주일헌금은 자주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웬지 한번에 드려도 될 것 같고..말이죠 ;;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큰 것 좋은 것 대단한 것만이 아닌 작고 소소한 부분들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큰 것을 드리려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작은 부분에도 신중을 기하고 진심과 진실함으로 나아가야겠구요. 문득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정말 감사하네요. 오늘도 작은 부분에 진실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

@owlnme
어제는 일곱번 정도 묵상을 입력했다가 웬일인지 다시 들어와보면 저장이 안되어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새벽기도 가야하는데 너무 새벽(12시30분)에 잠깨어 들어와보니 이제는 좀 작성이 되지 싶네요
간혹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시니까요.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숨은 선행을 보시고 '착하다' 하시고, 남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과연 그 칭찬 만큼의 선행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보시겠지요. 만약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보다 그 이전에 저 과부는 어째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을 수 있었을까요? 그 시대의 과부는 아무런 소득의방법이 없었을텐데 어떻게 그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넣을 믿음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과 그 사랑이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지 않았을까요? 삶을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moohando
어제 교회에서 총신대 교수님의 (구원론)강연이 있었는데, 부자 청년과 (악질)세리 삭개오에 대한 비교를 하더군요. 부자청년은 어떤 걸 보더라도 참 모범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했지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삭개오는 예수님 만난 후 자신의 삶이 변하는 장면("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영접했느냐의 차이가 두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기 쉽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는 분("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하반절)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hanbaek 님의 묵상처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아무일 없듯이 헌신"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교회 봉사하는 부분에 있어 암묵적으로라도 자랑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고, 헌금의 액수, 헌신의 정도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고정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manga0713
항상 영광의 자리를 원하는 욕심, 사망으로 인도하는 이 욕심을 없애주옵소서..^^

@YoungYeon
자신의 공을 세상에서 이미 칭찬 다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칭찬이 없는것을 압니다. 오른손이 한느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선한일을 행하면서 주님만 알고 계실꺼라는 생각으로 즐거워하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pullipggot

@tirol70
오늘의 말씀과 목사님의 묵상을 읽으면서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가진 '자의식'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쉽지가 않습니다.

@eripu
오랜만입니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주일까지 마태복음을 나가는 매일성경은 '화 있을진저'로 대표되는 23장을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천국 문을 막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 (마 23:13) 모습들을, 그리고 그들의 온갖 행태를 보시면서 결국은 유다인들의 눈을 완전히 가리시는 선언을 합니다(23:39).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바리새인 이야기는 계속 나옵니다. 아예 그들이 받을 판결이 중할 것이라고(40b) 강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1)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장소에서 윗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기 원하는 교만한 마음과(38b~39) 2) 없는 자에게서 굳이 돈을 빼앗고 (41a), 3) 길게 기도하기는 하나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41b)을 그 이유로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가톨릭에서는 지금도 예배를 하나의 제사로서 강조합니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예물기도).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시죠. 그런데 이 말씀을 그러니까 가난해도 모든 걸 다 드리면 나중에 복을 주신다 식으로 전용해서 해석하는건 말이 안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건 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을 돈이 있는데 그 돈을 구제하는 데 주는 대신 단지 자신이 가지고 아직도 풍족한 가운데 '조금'을 드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단지 가난한 자에게 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이 말씀을 쓰는건 아닌지.. 정말 자비가 필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2010년 3월 2일 화요일

트윗 매일 큐티 / 마가복음 10:17-22 (3월 2일)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hanbaek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경건한 청년과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하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주 예수를 믿으라 이렇게 말할텐데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요한복음적 메시지가 아닌 계명을 지키라는 실천적 메시지를 주님은 던지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계명을 지킴이 영생을 소유하는 길이라 말씀하실까요? 우리의 신앙은 실천적 모습을 떠나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습에 머무를때가 많습니다. 이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지주의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주님이 이땅에 육체로 오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의 실천적 신앙을 우리의 롤모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구체적인 실천적 신앙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도 우리의 삶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있는 신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실천적이며 구체적입니다. 또한 사도 야고보는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의 기록처럼 행함이 믿음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케 된다는 고백은 우리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말씀입니다. 오늘 트윗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People may doubt what you say, but they will believe what you do" -Lewis Cass 하나님의 사람들은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계명을 지키고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십니다.

경건한 청년은 모든걸 지킨 아름다운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더욱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한가지 부족한 일이 있다고 그건 바로 가진걸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는 자신을 따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경건하면서도 큰 부자였던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면 어떻게 살라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자신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은 읽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고민은 되었지만 조용히 떠나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왜냐면 그런 주님과 함께 있다가는 재산을 가진 것만으로도 돌에 맞을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오늘 주님의 말씀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번주부터 목사님이 매주 설교 시간에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가진 모든걸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만이 교회에 올 자격이 있다고 하시면 몇명이나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본문의 말씀은 일반 사람들이 들어도 쉽게 Yes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주님은 경건한 청년에게 그리고나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라 말씀하신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분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물과 함께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에게도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에게도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며 이는 주님의 제자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시점은 주님이 공생애를 거의 다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또 다른 제자를 맞는다는건 주님께 완전한 신뢰는 받는다는 말입니다. 제자가될 청년이기에 주님은 자신의 모든걸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삶의 모든걸 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의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은 너무나 많은 자신의 재산을 나눌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천국을 소유할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인지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라면 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유욕을 버리고 내게 주신 모든게 주님의 것임을 다시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나의 모든걸 내어 드릴 용기도 필요합니다. 약자를 보면 내것을 언제라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십자가를 향하여 오늘도 걸어갈 믿음이 필요합니다. 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며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할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섬김을 통해 참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