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hanbaek
본문에는 주님이 행하신 참 이상한 일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헌금함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건 결국 헌금함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앉았으니 제자들도 뒤에 섰을 것이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헌금함 앞에서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상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몇번이곤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왜 주님은 헌금함 앞에서 그렇게 서서 사람들이 헌금하는걸 지켜보셨을까요? 또 주님이 서 있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다보면 본문이 즐겁게 다가옵니다. 주님이 지키고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사람들을 세종류라 생각됩니다.
1) 자랑스럽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자신은 나름 큰 돈을 헌금하기에 주님이 보시는게 뿌듯하고 더 많은 사람이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듯 당당하게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상을 이미 땅에서 다 받았느니라.
2) 어물쩡하게 헌금하는 사람들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니 원래 자신이 드리려던 헌금이 너무 작아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약간 금액을 조정하거나 차라리 헌금함을 피해 갑니다. 나중에 드리던지 아니면 그냥 잊어 버리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도 이러한 부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원짜리 꺼냈다가 색깔을 바꾸어 드리거나 험금드리는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할겁니다. 주님 앞에서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건 주님이 보신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주님이 보실 때에는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마음이 주변의 환경에 있다고 진단하십니다. 직분을 받고 자신의 헌금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선거에 나가기라도 하게 되면 더 큰 헌금을 하게 되는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 그냥 아무일 없는 듯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 참 드분 경우의 사람입니다. 너무나 얼굴이 두껍든지 아니면 진실한 헌금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의 경우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과부는 두렙돈이 땡그렁 소리나는 부끄러워보이는 헌금을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도 당당하게 드렸습니다. 자신이 얼마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정성과 진심을 담은 과부의 헌금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 나를 드릴 때 이 과부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시간을 드리거나 재능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리거나 우리의 시선이 이 땅의 상급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받으시고 하늘의 복으로 채우시리라 믿습니다. ^^
@hayea00
보여지는 부분이 아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오늘도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julie0429
주님은 참 세심한 분 같습니다. 그리고 참 예리하신 분이신 것 같구요.
하나하나 지켜보시고 판단하시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상급도 내리시고 깨달음도 주시니까요.
자연스레 제 모습도 뒤돌아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꼬박꼬박드리지만 사실 주일헌금은 자주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웬지 한번에 드려도 될 것 같고..말이죠 ;;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큰 것 좋은 것 대단한 것만이 아닌 작고 소소한 부분들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큰 것을 드리려고 소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작은 부분에도 신중을 기하고 진심과 진실함으로 나아가야겠구요. 문득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정말 감사하네요. 오늘도 작은 부분에 진실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
@owlnme
어제는 일곱번 정도 묵상을 입력했다가 웬일인지 다시 들어와보면 저장이 안되어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새벽기도 가야하는데 너무 새벽(12시30분)에 잠깨어 들어와보니 이제는 좀 작성이 되지 싶네요
간혹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시니까요.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숨은 선행을 보시고 '착하다' 하시고, 남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과연 그 칭찬 만큼의 선행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보시겠지요. 만약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보다 그 이전에 저 과부는 어째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을 수 있었을까요? 그 시대의 과부는 아무런 소득의방법이 없었을텐데 어떻게 그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넣을 믿음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과 그 사랑이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지 않았을까요? 삶을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moohando
어제 교회에서 총신대 교수님의 (구원론)강연이 있었는데, 부자 청년과 (악질)세리 삭개오에 대한 비교를 하더군요. 부자청년은 어떤 걸 보더라도 참 모범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했지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삭개오는 예수님 만난 후 자신의 삶이 변하는 장면("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영접했느냐의 차이가 두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기 쉽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는 분("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하반절)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hanbaek 님의 묵상처럼 "하늘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려지기 원하는 심정으로 아무일 없듯이 헌신"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교회 봉사하는 부분에 있어 암묵적으로라도 자랑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고, 헌금의 액수, 헌신의 정도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고정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manga0713
항상 영광의 자리를 원하는 욕심, 사망으로 인도하는 이 욕심을 없애주옵소서..^^
@YoungYeon
자신의 공을 세상에서 이미 칭찬 다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칭찬이 없는것을 압니다. 오른손이 한느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선한일을 행하면서 주님만 알고 계실꺼라는 생각으로 즐거워하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pullipggot
@tirol70
오늘의 말씀과 목사님의 묵상을 읽으면서 '자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가진 '자의식'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쉽지가 않습니다.
@eripu
오랜만입니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주일까지 마태복음을 나가는 매일성경은 '화 있을진저'로 대표되는 23장을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천국 문을 막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 (마 23:13) 모습들을, 그리고 그들의 온갖 행태를 보시면서 결국은 유다인들의 눈을 완전히 가리시는 선언을 합니다(23:39).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바리새인 이야기는 계속 나옵니다. 아예 그들이 받을 판결이 중할 것이라고(40b) 강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1)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장소에서 윗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기 원하는 교만한 마음과(38b~39) 2) 없는 자에게서 굳이 돈을 빼앗고 (41a), 3) 길게 기도하기는 하나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41b)을 그 이유로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가톨릭에서는 지금도 예배를 하나의 제사로서 강조합니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예물기도).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시죠. 그런데 이 말씀을 그러니까 가난해도 모든 걸 다 드리면 나중에 복을 주신다 식으로 전용해서 해석하는건 말이 안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건 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을 돈이 있는데 그 돈을 구제하는 데 주는 대신 단지 자신이 가지고 아직도 풍족한 가운데 '조금'을 드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단지 가난한 자에게 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이 말씀을 쓰는건 아닌지.. 정말 자비가 필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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