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6월 30일 창세기 25:19-26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삭 가정의 가장 큰 문제의 시발점이 나타나는 본문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하나이지만 두개의 분리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아들들이 살아가는 가정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이삭과 에서가 한편이고, 리브가와 야곱이 한편인 두개의 가정이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는데 그 사랑함의 중요한 모티브가 사냥한 고기였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지만 에서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들로 나가 사냥을 해야했고,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대신 결과물인 사냥감을 들고 오면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이삭과 에서의 사랑을 이어주는 사냥한 고기는 결국 에서에게 주었다고 생각한 축복을 야곱이 받는 최고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이 무엇을 하였기에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들이 좋은 학교를 들어가거나, 아들이 뛰어날 때 주로 아버지들은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들의 인격 자체를 사랑함이 아니기에 이삭과 같이 실패한 사랑이기 쉽습니다.

리브가와 야곱 또한 완전한 한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한 이유는 이삭과 조금 달랐습니다. 야곱은 주로 어머니 곁에 머물렀고 자연히 대화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야곱과 리브가는 가까워졌고 야곱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어머니 곁에 머물렀기에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야곱과 리브가는 모녀간의 깊이 있는 소통이 이루어졌고 리브가는 아무런 조건이나 바람없이 에서보다 더 많이 야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은 리브가로 하여금 조금 부족해보이는 야곱이 하늘의 복을 받게 하고 싶었고 초대형사고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도 어떠한 사랑이 더 큰가를 보여줍니다. 조건없는 사랑, 모자라도 함께 하는 사랑이 힘있습니다.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무엇 일지라도의 사랑이 강력합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리브가를 통해서 알게 하십니다.

야곱은 성품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팥죽 한그릇으로 배고파 쓰러지려는 형 에서와 협상합니다. 배고픈 형에게 식량을 무기삼아 장자권을 받습니다. 사실 자라나는 쌍둥이에게 장자권이란 별것 아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증서도 아니고 도장을 찍어서 증거로 남긴 것도 아닙니다. 에서에게는 아주 작은 시간의 차이로 평생을 동생으로 살던 야곱이 마치 나를 형이라 부르면 내가 팥죽 줄께라는 표현 정도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맹세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일생에서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고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성경이 에서와 야곱의 삶 전체를 기록하였다면 이 부분을 우리가 찾아내서 확인하기 조차 힘든 언어적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둘의 운명을 뒤바꿉니다. 참으로 나비효과를 지닌 언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긍정의 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드러내는 말을 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나긴 우리의 일생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나의 한마디가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혀를 지켜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21:14-21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hanbaek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 서자 이스마엘을 광야로 좇아내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사회적 약자는 어린아이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좇겨나는 하갈은 이미 과부의 신분이며 이스마엘 역시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아이입니다. 게다가 집을 떠나는 신세이므로 나그네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성경이 말하는 3대 약자의 모습을 모두 갖춘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보내지는 땅은 브엘세바 광야입니다. 광야는 본래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지금도 광야 한복판에 길을 모르는 사람을 내려 놓으면 헤메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암흑의 땅입니다. 메마르고 먹을게 없는 사지로 약자인 하갈과 이스마엘은 떡과 물 한 가죽부대 만을 가지고 내쳐집니다. 하갈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마음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더 큰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는 아들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하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바라보며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아들 이스마엘 역시 엄마의 울음 소리를 듣고는 소리내어 울게 됩니다. 모자의 울음은 탄식보다 강하였고 심장에서부터 울리는 고통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더이상 슬플 수 없는 가장 극심한 심적, 육체적 고통을 맛보았고 소년 이스마엘 역시 타는 목마름과 어머니의 눈물을 통해 극한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러한 눈물과 아픔의 현장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친히 그 고통을 씻겨 주시러 찾아오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눈물의 현장에, 세상의 사회적 약자의 가장 심각한 모습을 지닌 나그네되어 죽음을 목전에 둔 과부와 아이에게 주님은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울음과 아픔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늬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심이저 우리가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아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탄식으로 가득하고 빛이 없어 보이는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늘 두려움 없는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희망의 눈을 뜨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갈에게는 샘물이 보였고 그곳에서마시며 물을 채우고 힘차게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늘 함께 하셔서 광야에서조차 살아남아 성장하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보게하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온몸으로 알게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오늘 우리의 상황이 힘겨워도 힘차게 주를 향해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창세기 19:23-29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으로 ㅠㅠ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hanbaek
"하나님이 롯의 가족들에게 도망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화를 입는다고 했으나 롯의 부은인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입니다. 사위들은 따라오지 않고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이 도망쳤으나 아내 역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도 두 딸도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가족이 당하는 화는 남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깁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에 롯의 아내를 비방하는 해석은 너무나 율법적입니다. 오히려 남은 가족이 느낀 아내와 엄마 잃은 눈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온 가족이 하나님 나라에서 환한 웃음을 웃기 위해서 우리는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중에 어느 누구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고통받지 않도록 손을 잡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야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은 결국 자녀를 경책하시는 마음으로 최후의 결단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참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밝히고 정결케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나눔의 삶을 실천할 때에 죽어가는 세상이 희망을 보게 되며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 갑니다. 우리가 의인의 삶을 살아 소알을 구하고 내 주변에 있는 소돔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스마트폰과 영성

스마트폰과 영성

김태연 목사 @hanbaek

작년말 등장한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이 소리없이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무엇이길래 메가톤급 폭발력을 가진 힘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은 컴퓨터가 하는 일을 대신하는 손안의 컴퓨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50점 정도되는 정답입니다. 스마트폰이란 단순하게 작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은 사용자에게 24시간 내내, 어느 장소에 있어도 네트웍에 연결하여 있게 하는 몸의 일부와 같은 새로운 기기입니다. 컴퓨터는 우리가 일을 하려고 할 때 켜고 끝나면 끄는겁니다. 또한 우리가 산위에 올라가거나 하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계속 네트웍에 접속하는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지리산 꼭대기에서 전화가 되기만 하면 우리를 네트웍에 연결시켜 놓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터치만 하면 세상과 즉각적인 소통이 일어나는게 스마트폰의 진정한 힘입니다.


또한 스마트폰은 3 Screen이 통합되는 모델입니다. 세 개의 스크린이란 TV, 컴퓨터 그리고 핸드폰을 말합니다. TV가 진화하여 DMB가 되었습니다. TV가 손안으로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컴퓨터는 넷북으로 진화했습니다. 800그램으로 이동성을 확보했습니다. 전화는 더 크고 편안한 창으로 쉽게 사용하는 방향으로 터치스크린을 장착했습니다. 하지만 TV에서 컴퓨팅이나 전화는 할 수 없었고, 넷북으로 전화를 하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또한 핸드폰으로 컴퓨팅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이 세가지 기능을 모두 갖추고 완벽하게 이 일들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통합으로 스마트폰은 전에 세상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기기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스마트폰이 전무후무한 힘을 가진 새로운 기기라는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어떤 기능이 세상을 바꿀 새로운 힘의 주체라는 겁니까? 그리고 스마트폰은 일부 젊은이들만 사용하는 최첨단 디지털 기기가 아닙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쉬운 두 번째 답부터 하자면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기능의 통합을 생각하시면 정답이 나옵니다. TV가 어려운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이제 70대 어른신들도 핸드폰으로 문자는 보내십니다. 결국 컴퓨터가 조금 어렵습니다. 하지만 쉬운 TV와 핸드폰 +컴퓨터이기에 스마트폰은 일반 컴퓨터에 비해서는 정말로 쉽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쉽고 편리해 집니다. 거의 완벽한 수준의 음성인식도 이제 곧 스마트폰을 통해서 구현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드립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한 디지털혁명은 SNS(Social Network Service, 대표적인 서비스가 트위터, 페이스북입니다)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컴퓨터와 했던 모든 일은 특정회사의 컴퓨터와의 대화였습니다. 네이버 지식검색을 할 때 우리는 네이버의 서버와 만나서 대답을 얻는 겁니다. 우리가 구글을 통해서 검색을 할 때에는 구글의 데이터센터에 있는 로봇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대답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컴퓨터로 했던 거의 모든 작업들은 회사의 서버와 데이터센터와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SNS를 통해서 이제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사람과 연결되는 새로운 네트웍이 시작되었습니다.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컴퓨터와의 대화를 떠나서 사람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컴뮤니테이션의 주체에 서버가 아닌 내가 자리를 잡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 콘서트에 갔다가 아이폰의 배터리가 14%밖에 안남았습니다. 상황을 계속 현장 중계하려면 여분 배터리가 절대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 제가 트위터로 내가 처한 상황을 보냈는데 불과 5분 안에 충전배터리를 가지신 분에게 연락이 왔고 만명이 넘게 모인 복잡한 장소에서 서로 연락하여서 만나 계속 상황을 중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네이버나 구글에 글을 등록했다면 다시말해 서버와 만남을 시도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새로운 네트웍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의 키워드는 인간이 중심되는 네트웍을 통한 소통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는 소통이 일어나게 해주는 가장 편리한 도구입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세상과의 소통은 우리 기독교의 영성과도 상당히 유사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처한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음성을 발하기도 해야 합니다. 가장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은 24시간 어느 장소에 있든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우리의 현재에 하나님과 소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네트웍에 연결되어 있었던 경험이 없기에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몸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직접적으로 소통한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닫습니다. 작은 기기 하나로 세상과 직접 연결되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의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고 귀를 기울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입을 벌려 소원을 말씀할 수 있는 확실성을 우리에게 제공했습니다. 변화의 시대에 우리의 영으로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의 몸으로 세상과 소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단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스마트폰을 필두로 생겨나는 인간만 중심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시각이 인간에게만 집중되면 지나친 인본주의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자연을 대상화하여 파괴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손에 든 기기가 첨단을 넘어 온 세상을 한눈에 바라보는 진보를 이룬다할지라도 우리의 심장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땅을 지키고 보존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아이폰용 터치펜

가까운 지인께서 선물로 주신 터치펜을 써보고 많이 주셨기에,
트위터에서 @hanbaek 을 팔로잉하고 이와 관련된 글을 RT하면 10분을 추첨해서 아이폰용으로 나온 터치펜을 나눠드리는 이벤트로 진행합니다.

아이폰은 정전기식이라 펜 앞쪽에 반도체로 만든 플라스틱을 부착해야 합니다.
게다가 일정 크기 이상이 화면에 눌려야 하기 때문에 평범한 면이 항상 터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부분이 중력을 따라 돌아가는 방식으로 설계했으며, 이 부분을 특허로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이폰용이라고 적었지만 안드로이드에서도 다 사용할 수 있는 터치펜입니다.

모양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중에서 2만 4천원에 판매되고 있는 모델이고 물론 한개만 따로 포장되어서 착불로 드립니다. 제가 혼자 발송하다 보니 택배비의 압박으로 인해서리 ㅠㅠ


터치펜은 정전기식이므로 가급적 얇은 보호필름을 사용시거나 저처럼 아예 사용하시지 않을 때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한쪽은 손으로 잡아 주시면 감도를 높인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이벤트 저도 즐겁고요. 받으시는 분도 즐겁게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꾸벅..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16:6-14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사래의 핍박이 너무나 심하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하지만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광야의 길을 떠나는건 너무나 위험한 행위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광야길을 달리면서 가진 생각은 절대로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 입니다. 왜냐면 광야의 길은 너무나 험하고 두려워서 차안에 있으면서도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광야길을 홀로 걸어가는 하갈에게는 수많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이 임신한 아이와 함께 죽을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한발한발을 눈물로 나아가는 하갈에게 야훼께서 보내신 사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하갈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권고와 위로를 전했습니다.

본문에서 하갈은 하나님께 기도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먼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과 탄식을 들으십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탄식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첫번째 소리입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나 힘겹고 괴로울 때는 기도하기조차 버겁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한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가장 합당한 응답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에서도 너무 마음이 슬퍼 취한 여인과 같이 탄식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응답을 주셨습니다. 오늘 고통받는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께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이스마엘은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깨닫고 감격하는 삶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탄식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길 소망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과 나를 위한 도우심이 온 몸으로 느껴져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감격의 날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