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9일 목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7:6-12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의 나이가 육백살이었습니다. 노아의 나이를 보면서 또한번 놀라게 됩니다. 우리의 일생이 길어도 일백년인데 살아가는 동안 너무나 많은 죄악을 범하고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위대해 보이는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70세가 넘으셔서 은퇴하실 때가 되면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600년을 사시면서도 의인이며 당대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노아를 생각하면 다시금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새출발을 다짐해 봅니다. 600세의 1/10도 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날 동안에 죄악된 길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드리려 합니다.

노아와 세아들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들은 모두 방주에 들어가는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노아가 만일 혼자 살아 남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함께 살아 가도록 설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만나고 함께 일하는 모든 분들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다고 하면 세상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울까요? 하나님이 사람들을 주신 이유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시길 소망합니다.

드디어 대홍수가 일어납니다. 사십주야 동안에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또한 땅에서 샘들이 터져 물을 쏟아 냈습니다.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물을 부어 40일 동안 지속되자 온 세상은 다 물에 잠기게 됩니다. 세상이 다 잠긴 상태로 물위에 떠서 목적지 조차 없이 방주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니고 있습니다. 그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방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암흑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방주를 안전하게 안착시키리라 믿으며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홍수의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기에 노아의 가족은 어두움을 뚫고 빛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설마 방주처럼 흔들리겠습니까? 그 때만큼 위험하겠습니까? 삶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약속을 믿고 힘차가 걸어가 평안한 삶으로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4:5-8

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hanbaek
죄를 범한 인간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삶과 예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엄청난 분노를 일으킵니다. 왜 그럴까요?
가인에게는 아벨과의 비교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컴플렉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은 악하고 아벨의 삶은 선하고 자신은 타인에게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하지만 아벨은 사랑받고 있음에 대하여 심한 비교의식이 있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분노는 경쟁자에게 표출되곤 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사랑받기 위해 삶을 고치기 보다는 경쟁자를 향한 분노로 동생을 죽입니다.
인간은 비교대상자를 향하여 지독한 분노가 있으며 그가 없어지면 세상이 자신을 향하여 돌아오리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인처럼 경쟁자를 향한 컴플렉스가 우리를 덮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을 버리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가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인에게 있는 죄성과 분노를 삭히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 큰 가인의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장에서 분노의 감정은 일어나곤 합니다. 때론 정말 참을 수 없을만큼 우리를 힘겹게 하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이상 견딜 수 없어 폭발하려 할 때 우리의 심장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음성입니다. 이 세미한 음성에 귀를 귀울이면 우리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분노 게이지가 오르려하고 우리의 마음이 범죄하려 할 때에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멈출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synsophia
말씀을 보면서, 처음에는 가인이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 상황에서 회개하지 않았을까.... 3인칭으로 가인을 바라봤습니다. 저러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곱씹을수록, 지금 가인의 모습이 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만, 머리와 입술에 그치는 회개가 대부분이었던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냥 머리로만 죄를 인정하고 행동으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생각이 드니 도저히 이 말씀을 계속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머리로만 회개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솔직히 앞으로도 머리로만 회개하는 일이 많을 텐데... 왜냐하면 그게 내 본성이고 죄성이니까.... 그럴 때마다 내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셔서 머리에서 그치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이 변하는, 행동이 이어지는 회개를 하게 해 달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는 가인의 모습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는 내가 되어 달라고...

@eripu
왜 우리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의 모습을 떠나 살인자가 되려고 할까요. 우리에게 그 죄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자 바꿀 수 없는 슬픈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죄를 허락한다면, 정말 죄가 우리가 나가는 문 앞에 엎드려서 곧바로 우리를 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대속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가 우리 삶 속에 필요합니다.

@YoungYeon
형제는 하나님이 가족으로 허락하신 좋은 친구입니다. 사랑으로 혈연으로 묶인, 그러다보니 그 친밀감이 강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가인은 죄를 다스리라는 말에 오히려 그 시기 질투심을 묵상하다가 결국 일을 저지릅니다. 선한의지를 품으면 살려고 애써도 한번 울컥허면 맘이 악한 생각을 품게되는데,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않고 그냥 놔두다가  결국 형제를 죽입니다.

오늘 저도 맘속에 선한 것으로 채우고 있는지, 내 삶 속에 죄가 들어오고 나의 친숙한 죄성이 고개를 들때 그 것을 다스리며 나아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문에 엎드려 있는 죄를 보지 못하면 걸려 넘어지니, 그런지 않도록 선한 마음을 지키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TAE_HYUN
내 안에 숨어 있는 비교 의식, 시기, 질투, 원망, 욕심... 모두 깨끗하게 비워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텐데 여전히 죄에 얽매여 있는 제 모습이 밉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 죄를 다스려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graceviky
태어날 때부터 아마도 가인은 자격지심 같은게 있었나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벨이 부러웠겠죠? 그래서 저도 사랑을 나눠주려 노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의 상처나 아픔때문에 범죄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죄를 다스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가인은 또다른 범죄를 행합니다. 제 마음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깨닫고 다스려야 하는데 남탓하고 내 자격지심에 싸여 다른사람들에게 또다른 범죄를 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오늘은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는 인간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왜 선악과를 먹은 것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정확하게 알게되면 우리는 선악과의 유혹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물론 아는 것과 행하는건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선악과란 무엇일까요? 선악과는 말 그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입니다. 왜 그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선과 악을 아라야 인간이 더욱 선한 일을 할텐데..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과 악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인간이 가는 길은 늘 악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길이 넓고 편안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순환하기 마련인데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늘 악을 선택했습니다. 전쟁과 경쟁에서 이기는 길에 악한 생각과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성이라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악을 알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잘못입니다. 악한 방법을 피하고자 매스컴이 알려주면 더 많은 모방범죄가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악한 소리, 악한 생각, 악의 방법 등을 우리의 머리와 입술 그리고 삶 속에서 버려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마음만 생각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고자 순종하면서 악을 잊은채 살아가는 순결한 자세를 견지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을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먹으면 죽지 않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뱀이 말했습니다. 아담의 입장에서는 분명 둘중에 한쪽은 거짓을 말한 겁니다. 그럼 먹고 죽을 확률이 50%입니다. 그리고 죽지 않으면 하나님 처럼 될 확률도 50%입니다. 우리가 러시안 룰렛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총을 쏴서 머리에 맞을 확률이 50%라고 하면 누가 감히 방화쇠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죽을 확률이 50%인데도 선악과를 먹는 인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인간의 원죄란 다름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일에는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처럼 인간을 다스리는 자리에 갈 수 있다고 하면 영혼을 파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처럼 되는 힘을 때론 돈에서 때론 명예에서 때론 권력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100만불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보물섬을 찾은 사람들끼리 서로 독살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걸 장면을 보면서 세상에 저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일상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그보다 더 한일도 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건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즉각 죽은게 아닙니다. 실제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사리를 알게 되어 부끄러워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걸까요?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셨고 인간은 밝아진 눈으로 살인을 하는 족보를 창세기 4장부터 만들어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정녕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뱀이 말한데로 눈은 밝아졌으나 하나님처럼 되지는 못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절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밸과 사탄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처럼 될거라고 하는 어리석은 욕심을 가지게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더 많은 사람을 상처입히고 자신 또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신비로 오히려 더 낮은 자로 살아갈 때 원죄의 욕망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인카네이션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하도록 우리를 쳐서 복종시키는 믿음의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트윗 매일 큐티 / 창세기 2:18-19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조에 관하여 약간의 상충되는 부분이 등장하는건 성서학자들이 찾아낸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19절에 보념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들짐승을 만드셨지만 2장에서는 손수 흙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약간의 차이는 고대에 있었던 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이 더욱 오래된 자료이고 창세기 1장은 보다 신학화되어 정리된 후대의 자료입니다. 이러한 상충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창조이야기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있기 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보고 적었겠으며 그 당시에 무슨 문자가 있었겠습니까? 첫번째 사람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가 후대로 오면서 얼마나 많은 변형을 일으켰겠습니까?를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며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담이 생물을 부르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름이란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목사님하고 소리치면 전 늘 저를 부르는줄 알고 뒤를 돌아봅니다. ㅠㅠ 직업병입니다. 목사라는 이름이 이미 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제 이름이 소시의 태연과 같기에 공연히 태연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ㅋ 인디언들은 이름을 존재를 담아서 짓기로 유명합니다. 늑대와의 춤을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늑대와의 춤을 인것은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존재가 담겨져있기에 우리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묵상해보면 우리가 불리는 이름의 의미가 온전한지 나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건 부모의 몫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는 이름을 지을 권리가 있습니다. 제 큰 아들의 이름은 임신 3개월에 이미 지었습니다. 그런 권세를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이 부르는게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또 하나의 창조이자 존재로 하여금 의미있게 하는 힘입니다. 이러한 자격을 아담은 부여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대자연의 어버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자연의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대해야 하고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답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짓고 부를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를 부모로 삼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그 역활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 복으로 충만하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트윗 매일 큐티 / 고린도전서 11:20-29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hanbaek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대부분 주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 중에서 이 글만은 사도바울이 분명히 알고 있는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주님이 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본문의 내용과 해석은 오늘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단히 의미깊은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진행하는 고린도교회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부자와 빈자 그리고 주인과 종이 함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성만찬에 사용할 음식을 각자 준비해 왔습니다. 부자는 풍성하게 빈자는 빈약하게 주인은 종들이 준비한 것으로 종은 자신이 먹을만한 모자란 음식으로 가져왔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만찬을 할 때에 현재의 도시락처럼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자신이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교회 안에서도 취하고 배불렀으며, 빈자는 예배 후에도 시장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주인들은 편안히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먹음으로 시간에 문제가 없었지만 주인의 음식까지 준비하던 종들은 마치고 해야할 일 때문에 시간이 모잘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며 꾸짖었습니다.

바울이 바라본 주님의 성찬은 나눔의 의식입니다. 주님이 몸과 피를 나눴듯이 교회 안에서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계급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는 평등한 공동체의 현장입니다. 우리나라도 종은 주인들과 한상에서 먹지 못했는데 주님은 2천년전 모든 사람은 한 상 즉 성찬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에는 선교사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는데 종들을 같은 상에 먹게 하는 선교사의 따뜻함에 감동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성찬은 회복입니다. 성찬은 나눔입니다. 성찬은 함께 밥상에 앉는 행위입니다. 김지하 시인이 밥은 하늘이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성찬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 모두에게 하나된 밥상에서 하나된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이 주님의 진심어린 마음을 따라 참된 나눔의 현장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을 통하여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만찬의 날을 기념하면서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떡과 잔을 나눔은 매일의 일상의 식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떡과 잔이지만 우리에겐 밥과 국 또는 밥과 찌개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몸과 피를 주셨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생을 품고 이 땅에 서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먹던지 무엇을 마시던지 주님의 온몸을 나누셨던 뜨거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나눔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YoungYeon
나눔이 가능 한 것은 "사랑"때문입니다. 엄마가 짜장면이 싫어서 안먹은게 아니라 자식이 먹는게 더 행복했으므로 자신은 구경만, 물론 풍족한 형편이었다면 다르겠지만, 없는가운데 좋은 것을 양보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이미 주님께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선물을 줄때도 내가 쓰기에도 아까운 좋은 것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버리긴 아깝고 내가 쓰긴 싫은 걸 주는지...그 사람의 영성을 볼수있죠.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물론, 사망 권세 이기신 분이지만, 그분의 그 처참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인간은 하나밖에 안가진 바로 그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
크리스챤들이 더 사회에 모범이 되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아~예수님 믿는 사람이구나 알아볼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하루도 힘내서 서로 사랑하기에 바쁜 시간들 보내길 기도합니다.

@canon7
유월절이 시작하는 첫날 화요일에 유월절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행하는 모든 방법데로 실시를 했는데 정말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유월절 세데르에는 예수그리스도와 그 언약 약속이 담겨 있고 그 세데르 만찬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만찬이였습니다. 첫 시작은 촛불을 키는 것 부터 시작하더군요 집사님이 예수그리도가 빛으로 우리가운데 비추는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가운데 항상 원망하고 까먹은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 때 이 만찬을 나누시고 십자가길로 가신것을 보게 됩니다. 유월절은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즐겁게 그 유월절을 지내지만 그들에게 행할고 하셨던 그 일을 기념하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난한 자를 함께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빠져 있고 자신들의 파티를 즐기는데 연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날의 기념하고 해야 할 그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이웃을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님의그  말씀을 생각하지 않는 그 모습을 경고하며 그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죄를 짓는거라고 말씀 하십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항상 내가 먼저였고 나 자심만 괜찮으면 즐거우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eripu
성찬의 이유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찬이 너무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는데, 그 죽으심을 얼마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도 얼마나 기념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에서 까지요) 단지 위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떡과 잔만을 나누어야 예수님의 성찬인지, 정말 우리 삶속에서 서로 나누고 베풀어 주면서 주님의 성찬을 기념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십자가를 계속 기억하고 그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신 그 큰 은혜도 우리가 기념하게 하소서!

@jk3647
그동안 자신에게 거짓된 성찬을 한건 아닌지 생각하게됩니다.

@zibanitu83
자신의 몸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피를 흘려 새 언약,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셨는데도 옛사람의 모습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보시고 주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다른 곳도 아닌 그 예수님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나도 예배하는 가운데서, 보내심을 받은 세상에서 경솔하게 행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심을 기억하고 그와 같이 사랑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gracelim7
고대의 풍습 중 사람을 먹는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람만의 고유한 기질을 소유하게 된다고 믿었다 합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며 떡과 포도주를 몸으로 비유하시는 장면도 이제 육신으로는 죽으시지만 부활하실 그 분의 성품을 우리 안에 담고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히는 꼭 그렇게 되어져야만 하지요.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신 그 분이 가신길을 가길 원합니다.

@IM_Zaya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만찬의 행위가 언제부터인가 그냥 습관적인 행위가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그냥 고난주간에는 의무적으로 특별 새벽 기도에 참석해야하고 부활절이 되면 행사 치르기에 바쁘기만 하지 정작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은 고난도 부활도 하지 않고 계신듯 합니다. 성만찬의 시간을 통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G_Park01
고난주간입니다. 정말 마음을 치는 말씀들을 많이 읽고 듣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제 삶의 도구로 쓰고있는것은 아닌지 회개했습니다. 본말전도의 기복신앙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주셨으면 합니다.

@hayea00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매달 첫째주는 성찬주일로 보냅니다.
성찬을 땔 때마다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성경 구절이라, 더욱더 감동이 새롭습니다.
매달 성찬을 하면서도, 주님을 세상에 전도하지 않는 저를 회개합니다.
마음을 새롭게하여, 성찬을 떼는 부활 주일을 보내야겠습니다.

@starlica
저도 @IM_Zaya 님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사가 되는게 아닌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graceviky
의례적 행사가 아닌 성만찬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 우리죄를 더욱더 철저히 회개해야겠습니다.